본문 바로가기

물고기인간의나라

(17)
마치 달팽이 처럼 때때로 숨이 막힌다.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는 길 예견하지 못한 창날이 만들어내는 상처 올려다보고만 아득한 하늘아래 느끼는 현기증 그러나 빛나는 유리조각은 언제나 나를 매혹하고 바삭대는 바닥을 디디며 길고긴 붉은 흔적을 남겨. 서서히 마치 달팽이처럼 말라 비들어져가는 근육으로 한줌 남은 촉촉함마저 길가에 뿌리고 한발 다시 한발 내딛어 마치 달팽이처럼 구름이 태양을 가려 유리조각들은 빛을 잃고 끝을 알수 없는 깊은 샘은 매꿔지리라 그때가 되면 이 무거운 걸음도 한결 편해지리. 비를 기다린다 그래, 마치 달팽이 처럼 하염없이 ,하염없이.
소녀의 초상 5 - 열매 작고 하얀 신의 집에 작고 하얀 바구니가 버려진 것은 스산한 바람에 나무들이 그 잎을 떨어뜨리는 계절이었습니다. 바구니를 발견 한 것은 하얀 옷을 입은 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 그는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고, 그 안에 갓 태어난 아기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기는 하얀 집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틈에서 하얀 옷을 입고 자라나게 되었지요. 아이는 자신이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하얀색 말고 다른 색의 옷을 입은 사람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이 입은 옷의 색을 하얗다고 부른다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깊은 밤, 아이가 하얀 옷을 입고 막 하얀 천이 깔린 침대에 누워 막 잠을 이루려 하는데,..
소녀의 초상 4 - 식[蝕, eclipse]의 기사 검에 어린 빛이 서늘한 궤적을 만들어낸다. 이윽고 붉은 액체가 거칠게 대기 중으로 튀어 오르고, 매끄러운 갑옷 표면위에 붉은 얼룩이 늘어난다. 허나 그는 피를 뒤집어쓰고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다시금 검을 내리 긋는다. 등 뒤에서 덮쳐오는 기색을 느끼자 상체를 회전시켜 적의 공격을 피하며 팔꿈치로 다가오는 머리를 내리찍는다. 이윽고 허물어진 상대의 등에 검을 박아 넣은 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뽑아들고는 왼쪽에서 크게 베어오는 남자의 품속으로 흘러든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겨드랑이에 치명적인 상처를 새기자 다시금 피가 쏟아진다. 눈가로 뿜어진 피를 살짝 고개를 돌림으로써 피하자 그것들이 고스란히 뺨 위를 물들인다. 허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적들을 베고, 베고,..
어쩌다보니, 유러피언프리코치즈버거 사실, 새우버거를 먹을 것이라고 예고를 하기는 했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손에 들어온 것이 이름도 요란 뻑저지근한 유러피언프리코치즈버거. 자그마치 11글자나 된다. 사운드 호라이즌의 11문자의 전언도 아니고!! 어제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를 예상 못하고 이불을 얇은 것 하나만 덥고 잤더니 도로 감기에 걸려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해더니, 생전 먹어볼 생각도 안했던 이 비싸신 햄버거를 가져 오셨다. 여튼, 받은 것이니 감사히 먹겠습니다! 포장지는 럭셔리한 광택이 도는 치즈 빛. 주황색과 노란색으로 치즈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영어와 한글로 유러피언프리코치즈버거라고 쓰여있다.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한줄이 더 적혀 있다. [화재발생 위험이 있으니 전자렌지에는 절대 넣지 마십시오] …역시, 은박인건가! ..
가위 바람이 불었다. 그 순간, 올려다본 하늘은 푸르러, 한없이 높고 끊임없이 펼쳐진 깊고 깊은 심해와 같이 푸르러 나는 마치 작고 보잘 것 없는 벌레처럼 그 아래를 초라히 기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대기는 더 이상 대기로 존재 하지 않았고, 나는 거대한 하늘이란 어항 속에 감금 되어 표본통 속의 나비처럼 서서히 질식해 가고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앞섶을 쥐어뜯었으나 목을 조르는 답답함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고, 끊임없이 펼쳐진 그 공허한 심원은 마치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눈동자인 마냥, 무자비하고 무감각한 시선으로 그 아래 꿈틀 거리는 보잘 것 없는 생명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다. 초월적인 힘에 압도되어 나는 그리 생각 했다. 허나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대기에 짓눌..
소녀의 초상 2 - 그리고, '소년'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책을 덮는다. 여린 입술을 타고 나오는 한숨.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티 없이 맑은 눈동자. 그에 어린 만월은 조용히 밤을 밝힌다. 덮여진 책의 표지에는 빛을 발하는 듯 하얀 소녀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샘의 그림과 하나의 짤막한 문구가 자리하고 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두 개의 단어를 소리를 내어 읽어본다. 샘의 소녀. 여린 뺨을 붉게 상기시키고 소년은 책을 품에 끌어 않는다. 마치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곰 인형을 끓어 안듯 다정히. 이윽고 들어 올린 얼굴에 떠오른 것은 동화를 향한 동경. 옷장에서 낡은 망토를 꺼내어 긴 수도복 자락위에 걸친 뒤, 소년은 낡은 나무문을 연다. 스산한 바람에 횃불이 일렁이며 자아내는 그림자 사이로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달그락거리는 나막신을 벗어들고. 한 발, 또 ..
소녀의 초상 1- 옛날에 어느 깊은 숲속에 한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나뭇잎으로 지은 옷을 입고 맨발로 숲을 뛰놀았답니다. 소녀에겐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 아버지에게 많이, 아주 많이 사랑받고 있었답니다. 그러한 날들은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보름달이 뜬 깊은 밤에 집을 빠져 나와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을 만났습니다. 그는 천공의 문을 지나 숲으로 오고 싶어 했지만, 발을 디딜 곳이 없어 감히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소녀가 말했습니다. [내가 디딤돌이 되어줄게요.] 그리하여 신은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었답니다. 소녀의 친절이 고마웠던 그는 소녀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지요. [이 숲에서 영원히 ..
드디어 백조 생활 청산?!?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