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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단편

네가 그리는 궤적



1.

  그것은 우주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 흔한 천체에 불과했다. 태양에게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어 한줌 빛도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공허히 존재하며, 설혹 빛이 흘러든다 해도 온전히 빛을 내지도 못하는 검은 얼음 덩어리. 태양계에 존재하는 천체들 중에서 가장 검은 존재. 그것이 바로 너였다. 그러나 너는 수많은 암석과 얼음덩어리들의 틈바구니에서 튕겨져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너의 운명은 역전한다.

  이유? 목성이나 해왕성의 중력, 혹은 또 다른 천체의 충돌. 따져보면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 앞에 펼쳐진 길이다. 너는 다른 천체들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길을 걷게 되는 거니까.

  태양계의 중심부로 끌려들어간 너는 광원에 점점 가까워진다. 카이퍼 벨트에 방치 되어 있던 시절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양의 빛의 산란(散亂). 네 몸뚱이는 태양과 가까워질수록 표면이 달궈진다. 이윽고 임계점에 달하면, 네 몸을 구성하고 있던 물질들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격열하고 강하게. 너의 몸은 안쪽에서부터 기화해 타오른다. 심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체들은 태양 빛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긴 꼬리를 만든다.

  특정 궤도로 오는 순간 너의 미래는 불확정에서 확정으로 고정된다. 수천, 혹은 수만 번, 너는 태양의 주위를 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태양에 가까워질 때마다, 그 열기와 빛에 타오를 것이다. 서서히 너를 구성하고 있는 수분과 먼지, 가연성 물질들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수증기를 뿜어낼 수 없어지는 순간 너는 혜성에서 단순한 암석 덩어리가 되어버린릴 것이다. 길고 아름다운 꼬리가 사라진 뒤에도 너는 같은 궤도를 돌며 같은 열기와 같은 빛에 노출 될 것이다. 처음 태양계의 품안으로 던져진 순간과 같은 우연이 다가오기 전까지. 아마도 영원히.



2.

  너 파란 양을 찾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알아? 어, 그래. 양, 파란색의 양 말이야. 옛날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색색의 병아리처럼 물감으로 염색한 가짜 파란 양, 혹은 어린 왕자의 상자 속에 들어있던 상상속의 양이 아닌, 진짜 살아있는 양을 말이야. 

  그래, 그 스스로도 자기가 얼마나 허황된 꿈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어.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할리 없다는 것 역시.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는  도무지 그것을 포기 할 수 없었지. 그 어리석은 집착만 뺀다면 그는 나름 완벽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멈출 수 없었지. 계속 되는 파란양을 향한 집착은 그를 좌절시켰어. 그는 스스로를 비참한 아주 작은 생물 – 마치 개미나 하루살이처럼 여기게 되었어. 아니 실제로 그는 비참했고 무력했어. 그에게는 파란 양이 없었으니까.

  결국 어느날, 그는 가진 것 모두를 내팽겨 치고 길을 떠났어. 길고 긴 여행이었지. 산을 넘고 물을 건넜어. 동화 속에서 나왔을 법한 수많은 위험과 모험들 끝에, 그는 한 신전에 도착했지.

  사제가 그를 맞아주었어.

  [아주 먼 길을 왔군요. 순례자여, 당신은 무엇을 찾아왔습니까?]

  그가 답했지.

  [이 안에는 진실의 샘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보여주는 샘이.]

  [네 그렇지요 이안에는 과연 그런 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순례자여.]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

  [나는 파란 양을 찾고 있어요.]

  사제는 그를 비웃거나 허황된 이야기를 말한다고 하진 않았어. 그러나 매우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

  [순례자여 진정 이 선택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크나큰 슬픔에 잠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어. 사제는 말없이 길을 내어주었고 그는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섰지.

  샘이 거기 있었지. 어둠속에 스스로 희미한 푸른빛을 내 뿜으며 그를 유혹하고 있었지. 동굴은 그 샘의 빛으로 밝혀져 있었어.

  그는 샘 앞으로 다가가 깊이 눌러쓰고 있던 두건을 벗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어. 그의 머릿속엔 그 순간에도 파란양, 오직 파란양 뿐이었어. 

  샘은 잠시 흔들리더니, 마치 평범한 샘이 그러하듯 그의 모습을 비춰줬어. 

  거기에 파란 양이 있었어. 

  그래 맞아, 그가 바로 파란 양이었던거야.

  그는 샘을 바라보면 소리 없이 울었어. 

  거기엔 파란 양이 있었어. 그래. 하지만 그건 그가 찾고 있던 파란 양이 아니었어. 그는 자신이 아닌 또 다른 파란 양을 찾고 싶었던 거야.

  슬프고 지친 얼굴로 동굴을 나온 그에게 사제가 물었어.

  [원하는 것을 찾았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어. 그리고 다시 슬프고 무거운 걸음을 내딛었지.



3.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너는 또 잔을 기울였다. 미처 내뱉지 못한 자잘한 뉘앙스들이 너의 입안으로 삼켜지는 모습을 나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가볍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리.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토록 무방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너이지만, 사로잡으려 하는 순간 네가 뿜어내는 열기에 나는 흔적도 없이 불타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 시선 안에 담기는 풍경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비록 영원히 네가 나의 것이 되지 않을지라도. 나는 너의 손짓 하나, 눈의 흔들림, 쏟아져 나오는 한숨 하나까지 모두 시야에 담는다. 

  너의 이야기 속에 흘러나오는 주인공이 되는 일이 없더라도 적어도 나는 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너의 반짝임과, 네가 그리는 궤적 하나 하나를 기억 하는 역할만은 누구에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너는 말없이 일어선다. 긴 인사의 말은 없다. 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선다. 창밖으로 푸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4. 
 
  운이 좋았다. 오늘 밤 하늘은 푸른빛이 서릴 정도로 시리고 맑았다. 달빛마저 없는 밤하늘에는 크고 작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천체관측을 하기엔 최적의 날씨였다. 나는 손쉽게 표적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뷰파인더에 흐릿한 상이 잡힌다. 익숙하지만 신중한 손놀림으로 배율을 고정하자 청녹색의 긴 빗자루 모양의 별이 뚜렷해진다. 혜성은 지구를 지나 점점 멀어지고 있는 중이지만, 태양과의 거리는 가까워 가장 밝게 빛나는 날이었다. 머지않아 너는 첨차 차갑게 식어 만원경으로도 보이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네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비록 찰나일지라도. 필시 너는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너의 궤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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