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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단편

빨리 잠드는 방법





  늦은 시간. 사위가 온통 어둠 속에 가라앉은 가운데, 희미한 달빛 속에서 풀벌레들이 노래한다. 이제 8월도 다 끝나가는 시기이건만 오늘따라 견디기 힘든 열기가 밤의 공기 속에 감돌고 있다.


  소녀는 더위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 속삭이듯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어서 꿈속에 빠져들라 채근하듯 조용조용히 울렸지만 잠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수를 헤아려 볼까. 아니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우유를 마시는 거야. 머리맡에 양파를 가져다 두는 수도 있지.


  몇 가지 잠을 이루기 위한 소소한 민간요법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지난날의 경험에 의하면 큰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아니, 그보다는 귀찮음이 더 컸음이라.


  그렇게 더위와 싸우며 침대 위에서 뒹굴던 소녀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왼쪽 엄지발가락으로 파워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왼손과 오른손으로는 스피커와 모니터를 켜는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위잉 파앗 딕딕딕딕. 익숙한 소음과 함께 윈도우가 실행되자마자 오른손은 마우스를 다부지게 움켜잡고 익스플로러를 실행시킨다. 재빠르게 키보드 위로 자리 잡은 양손은 자판 위를 오가며 짤막한 문장을 만들어 냈다.


  빨리 잠드는 방법.


  리듬감 있게 엔터를 누르자 잠시 화면이 하얗게 변한 뒤 곧이어 색색의 문자 나열들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빨리 잠드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정말 미치겠어요. 사실 저는 여름에는 잠을 잘 자는 편이였는데요, 요즘 들어 새벽 5시까지…


  응, 나도 미치겠어.


  안녕하세요, 님 혹시 스트레칭 해보셨나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전신의 긴장을 풀어주면 좋다던데여.


   물론, 해봤다!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해보면 어떨까요? 언제나 같은 시간에 자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면 생체리듬이…


  그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 


  잠을 잔다고 해서 세포가 쉬는 것은 아니고…


  어쩌라고?


  예상했던 바이지만 내용은 부분 신빙성이 없거나 지금 당장 실행하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소녀는 입술을 뿌루퉁하게 부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깊이 잠들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텐데.


  그런 생각에 잠겨 성의 없이 드래그를 하는 도중, 한 검색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길고 짧은 설명도 없이 단 하나의 간결한 문장이 거기에 있었다.


  [빨리 잠드는 방법]


  가느다란 손가락은 망설임도 없이 링크를 클릭했다.


  그리고 동시에 암전.


  가벼운 전자음을 남기고 모니터와 컴퓨터와 스피커의 전원이 꺼졌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발끈 했다.


  잠깐, 나 지금 낚인 거야? 이거 신종 바이러스 유포 수법? 아니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설마 하드가 날아간 건 아니겠지?


  허둥지둥 컴퓨터의 파워를 키려고 하는 순간, 낯선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키... 키....


  처음에는 기묘한 풀벌레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는 의외로 이상한 소리를 내는 생물들이 많은 법이니까.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기계음에 가까운 울림임을 알 수 있었다.


  키...쿠...ㅋ...


  소녀는 천천히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기묘한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히 전원이 꺼져있는 상태인데도 그 소리는 멈출 생각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쿠...ㅋ...ㅋ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리는 점차 선명해졌고, 명확한 울림으로 변해 갔다.


  ...ㅋ.... 키...쿡.......


  응? 뭐라고 하는 거지?


  쿠..ㅋ...키.....


  순간 머릿속에서 반짝하고 불이 켜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 어두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시린 형광등의 빛이 눈앞을 메운다. 눈에 익은 앞치마와 조리도구, 각종 식재료들이 그 앞에 늘어서 있었다. 재빠르게 압 치마를 맨 뒤 그녀는 필요한 재료를 골라 집었다.


  버터 130g, 계란 1개, 호두 30g, 설탕 70g, 에스프레소 1oz, 박력분 200g, B.P 4g,


  자, 그럼 신나게 만들어 볼까?


  먼저, 버터와 계란을 실온에 꺼내 둔 뒤, 박력분과 B.P는 체를 쳐두고 호두는 오븐에 130도에서 7분가량 굽습니다. 호두가 다 구워지면 잘게 다져두세요. 실온에서 적당히 부드러워진 버터를 크림 화 시킵니다. 그리고 설탕을 넣고 잘 혼합한 뒤 계란을 넣고 분리되지 않게 다시 혼합, 그 다음 에스프레소를 1샷을 뽑아서 넣고 또 혼합한 뒤, 가루 류를 넣고 가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섞어줍니다. 마지막으로 호두를 넣고 잘 섞은 뒤 180도로 예열한 오븐에 15분간 구워주면 끝!


  방을 나선지 20분 후. 소녀는 한바구니 가득 잘 구워진 쿠키를 들고 침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바구니를 스피커 앞에 내려두고는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가서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시 후, 소녀는 고른 숨소리를 내뱉기 시작했고 작게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스피커 쪽에서 울렸다.


  사각사각, 아삭아삭.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글쟁이들의 글 이야기]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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