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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蝕:ecli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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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셔츠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어 입에 물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멀어져 가자 여인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아름다운 녹색의 눈동자 속에 자리한 동공은 세로로 길다.

  여인은 잠시 동안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훔쳐보며 코를 킁킁 거리다 독한 담배 냄새가 흘러들자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어버린다.

  약간 거친 입술 사이로 가느다랗게 담배 연기가 흘러나와 바람결에 흩어졌다.

  “귀찮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소녀, 김나루는 아직도 건물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엇을 보는 것일까. 시선은 학교 어딘가로 뻗어 있었다.

  다시 강한 바람이 불었다. 남색 체크무늬 치맛자락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바람결에 춤추는 벚꽃 잎 사이로 사라질 것 같다.

  그때 벚나무의 검은 나무둥치에서 무엇인가 어둡고 형체 없는 것이 스멀대며 솟아오르는 것이 시선에 들어왔다. 하나, 둘. 검은 안개 덩어리는 여기저기서 솟아올라 마치 민달팽이처럼 꿈틀거리며 소녀를 향하여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미처 함께하지 못한 덩어리들이 툭툭 떨어져 움찔거리다 흙속으로 녹아든다.

  운율은 혓소리를 냈다.

  “쳇, 벌써 시작인가. 저 아이, 과연 귀찮은 체질이군.”

  검은 민달팽이 형상의 안개. 그것은 겨울의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생물의 흔적이었다.
  이 학교는 분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샐러드 볼처럼 움푹한 땅. 받아는 들이는 것도 까다롭지만 내놓는 것도 가벼이 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공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안에서 이루어 졌던 일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일부를 남겨두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계절은 봄. 만물이 술렁이는 시간. 이 시기에 마치 아지랑이처럼 저런 것들이 어디선가 솟아올라 배회하곤 한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저것들은 딱히 쓰인다 해도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는 것들이다. 그저 침입하기 쉬운 존재에게 달라붙어 그 기운을 훔치기 위해 노력하다가 소득 없이 바스러져 사라질 뿐.
 허나 지금은 분명히 평소보다 양이 많다. 분명히 저 소녀의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 저 정도 개체수면 무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작은 부스러기라 해도 그것들이 뭉치고 섞이다 보면 그 사이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이 눈을 뜨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법 성가신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기분 나쁜 것들.”

  내뱉듯 말하는 그의 눈가가 찌푸려진다. 경멸조차 어린 시선으로 그는 검은 민달팽이들이 소녀를 향하여 기어가는 것을 주시했다. 끈적끈적해 보이는 덩어리들이 이제는 거의 발치에까지 도달한 순간,

  “나비.”

  그가 호명했다.

  무릎에 기대어 있던 여인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암녹색 홍채가 더욱 가늘어지면서 부드럽게 미소를 짓듯이 입가가 흐트러진다. 여인은 우아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유연한 동작으로 창틀에 올라섰다. 작은 꽃무늬가 있는 연노랑 쉬폰 원피스가 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긋나긋한 몸놀림은 나태해 보이기까지 했으나 그 안에는 감출 수 없는 힘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사냥하기 직전인 맹수의 그것처럼.

  입술 양 끝이 들어 올려 지며 그 사이로 날카롭고 뾰족한 이빨들이 드러난다. 아름답지만 흉폭한 미소다. 검은 민달팽이들을 바라보는 기형(奇形)의 눈에 서서히 녹(綠)광이 어리기 시작한다.

  그때, 교정을 주시하던 소녀의 시선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조금 전 까지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검은 덩어리들을 발견이라도 한 듯.

  그리고 동시에 민달팽이들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정적.

  마치 시선을 마하고 말없는 대화라도 나누는 듯이 고요함이  솟아올랐다. 욕망에 가득 찬 떨림도, 생을 향한 갈망도 사라진 듯.

  그 기현상에 운율은 자신도 모르게 여인을 제지했다.

  “잠깐, 기다려.”

  금방이라도 뛰어 내릴 듯 몸을 굽히던 여인이 멈춰서 그를 돌아보았다.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는 시선도주지 않고 운율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느낌이었다. 기시감? 아니 틀리다. 어느새 그는 소녀에게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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