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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蝕:ecli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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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율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본관을 벗어나 별관으로 향하는 짤막한 오솔길로 들어섰다. 요철진 바닥엔 떨어진 하얀 꽃잎이 비 온 뒤 물이 그러하듯 고여 있다. 하얗고 보드라운 길 위를 약간은 시린 바람과 매끄러운 꽃잎을 맞으며 나아가는 동안 나루는 조금씩 걸음이 늦춰지곤 했다.
  "김나루?"
  그럴 때마다 운율은 몽롱하게 서 있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러면 그녀는 마치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이 정신을 차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별관이라 불리는 그 건물은 이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복도와 계단은 아직도 나무로 짜여 있었다. 미술실은 발을 디딜 때마다 살짝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이 층 복도 초입의 왼편에 있었다.
  운율이 익숙한 동작으로 문을 밀자, 열어두고 나왔던 창문을 통해 청량한 공기가 복도까지 흘러넘쳤다. 그는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섰지만, 나루는 쉽사리 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녀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꽃이 가볍게 흩날리던 교정을 걷던 때의 몽롱함은 이제 찾아 볼 수 없었다. 커다랗고 부드러운 검은 눈동자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어색해 보이는 나루를 향해 그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이곳에 데려와 좀 놀란 모양이구나.”
  그는 그녀가 왜 멈춰 섰서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보다 더 부자연스러운 '고요함'이 있을까. 지나칠 정도로 정화된, 부정한 것은 조금도 발붙일 틈을 주지 않는 공기.
  모든 것은 운율이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어떠한 그림자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묶어둔' 것에서 비롯되었다. 금빛 먼지나 새의 날갯짓, 작은 벌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넘나 들 수 있지만, 어둠만은 미세한 조각 하나조차 스며들지 못한다. 이곳은, 미술실은 온전히 살아 있는 것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는 나루에게서 몸을 돌려 볕이 스며드는 창가로 몇 발자국 걸어갔다.
  “이곳에 바라보면 학교 전물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모두 살필 수 있지.”
  나루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그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아까 네가 이 학교에 들어오는 모습도 다 지켜봤다는 말이야. 저기 저 나무 근처에 한참을 서 있던데….”

 “아….”

 “벚꽃이라도 보고 있었니?”
 나루는 잠시 운율의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미술실 안으로 걸어 들어와 창가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조용히 그 밖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다. 따뜻한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벚나무 둥치, 그 아래의 그늘진 곳.
  소녀는 입을 열었다.
  “…좋아하니까요.”
 그리고 한 번 더 부드럽게 속삭이듯 읊조렸다.
 “좋아하니까, 그래서 보고 있었어요.”
 순간, 그녀의 목소리에 겹쳐서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말이 울렸다.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된단다.’
 잊고 있었던 다정한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다.
 ‘보이지 않으면 저런 것들은 금세 잊혀 진단다. 그러니 저들에 대하여 잊을 때까지 눈을 가리고 있는 거야.’
 그 말대로 어린 시절, 운율은 눈을 가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기억을 봉하였고 그들을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한데 조모의 부재를 들은 순간 어찌하여 그것들은 다시 기억해낸 것일까.
 상냥하게 두 눈을 가리던 주름진 손의 기척이 되살아난다. 그 순간 느꼈던 것은 평온함과 안도감, 그리고….
 
 “하, 하하…. 그래, 좋아하기 때문이라 그거지….”
 그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네? 선생님?”
 의아해하는 나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아아, 아니다, 아무것도.”
 얼버무리듯 대답한 그는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나. 마치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온 달처럼 흐릿함이 가시고 시린 빛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친다. 투명하고 맑고 깊은 호수와 같은 소녀의 눈동자와 얼어붙은 거울같이 서늘한 눈빛이 얽혀든다.
 정결하고 고요한 교실을 중심으로 묘한 일렁임이 일었다. 결코 선 안을 넘어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낮게 속삭이는 듯한 기척이 창틀 밖, 복도와 교실 문틈을 쓰다듬는다. 그것은 마치 작은 샘에 던져진 돌의 파문처럼 넓게 퍼져가다 이윽고 조용히 가라앉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고요해지자 운율이 입을 열었다.
 “우선 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는 그녀의 그림을 책상 위에 펼쳐놓는다.
 “보아하니 솜씨가 상당하더구나. 혹시 예전에 미술을 배운 적 있니?”
 머뭇거리며 나루가 답했다.
 “아니요, 그냥 취미로 조금….”

 조심스럽게 살피는 시선을 무시하며 운율이 다시 물었다.
 “아직 특활은 어디에 들지 생각하지 않았지?”
 “네”
 “미술부에 들어오는 건 어때?”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나루가 되물어왔다.
 “미술…부요?” 

 “그래.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이쪽 방면으로 재능이 있어 보여서 하는 말이야."
 웃음기 섞인 어조로 그가 말했으나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말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소녀가 다시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좀 더 현실적인 일들을 그리는 것이 현명한 처신일 거다.”
  나루가 당황해 하며 의중을 재어보려는 듯 운율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그는 표표해 보이는 얼굴로 책상 위에 있는 아름다운 귀화(鬼畵)를 주시할 뿐.
 "뭐, 자세한 건 피차 천천히 알아 가면 되겠지.”
 도화지 위에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새하얀 벚꽃, 소년과 여인, 그리고 꽃그늘 아래 웅크린 검은 그림자들이 그려져 있었다. 하얀 꽃잎들의 품 안에서 그림자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평온하고, 고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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