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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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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운율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본관을 벗어나 별관으로 향하는 짤막한 오솔길로 들어섰다. 요철진 바닥엔 떨어진 하얀 꽃잎이 비 온 뒤 물이 그러하듯 고여 있다. 하얗고 보드라운 길 위를 약간은 시린 바람과 매끄러운 꽃잎을 맞으며 나아가는 동안 나루는 조금씩 걸음이 늦춰지곤 했다. "김나루?" 그럴 때마다 운율은 몽롱하게 서 있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러면 그녀는 마치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이 정신을 차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별관이라 불리는 그 건물은 이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복도와 계단은 아직도 나무로 짜여 있었다. 미술실은 발을 디딜 때마다 살짝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이 층 복도 초입의 왼편에 있었다. 운율이 익숙한 동작으로 문을 밀자, 열어두고 나왔던 창문을 통해 ..
10 종이 울리기 무섭게 복도는 재잘거리는 아이들로 가득 찼다. 운율은 어수선한 공기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이사장실은 두 층 위, 본관의 제일 으슥하고 구석진 자리에 있었다. 대부분의 교직원들은 가기 꺼려하는 곳이다. 그의 아지트는 몇몇 수상해 보이는 물건들과 일부 악취미적인 책들, 그리고 서류더미로 들어차 있다. 진검인지 모형인지 모를 벽에 장식된 낡은 칼은 둘째치더라도 기묘한 모양의 탈에서 억지로 시선을 돌려 책꽃이에 관심을 쏟던 방문객은 알 수 없는 검붉은 얼룩진 가죽 책들을 발견하곤 도망치듯 그 방을 빠져나가곤 했다. 그런 그의 사무실에서도 그나마 소박하고 편안한 -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정상적이라 할 수있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이사장실의 문에 걸려있는 open/close 문패였다..
7 운율은 다시 교사용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빛이 나른히 하얀 도화지위로 쏟아진다. 얇은 유리창을 두드리는 바람은 아직 서늘한 감이 남아있지만, 교실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한다. 금싸라기 같은 볕만이 창가를 따스하게 데울뿐. 운율은 무의식중에 안경을 쓰다듬었다. 한기를 막아주는 창문의 모습과 그의 ‘볼 수 있는’ 눈을 봉(封)하는 안경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비슷했다. 돌이켜 보니 안경을 쓰기 시작한지 벌써 20여년이나 흘렀다. 뇌리에 다정한 한마디가 떠올랐다.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된단다.’ 그것은 오래전 세상을 뜬 조모가 그에게 해주었던 말. 어린 시절 보아서는 안 될 것이 보는 것으로 인해 고통 받던 때. 그의 부모는 이형(異形)을 보았노라는 아들의 고백을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