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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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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그늘진 자리에 가느다랗게 뻗은 나뭇가지 끝자락에 그 꽃은 매달려 있었다. 꽃잎의 아랫쪽은 짙은 분홍빛이었다. 색은 꽃받침에서 멀어질수록 희미해진다. 잎 가장자리는 빛을 받아 살짝 투명하게 빛이 났다. 중앙으로 갈수록 그 빛은 줄어들고, 대신 농도 짙은 색이 그 자리를 메운다. 꽃잎은 가지 끝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꽃이 지는 시기다. 조금만 더 바람이 강하게 분다면 벨벳처럼 부드러운 잎새는 거친 바닥에 떨어져, 밟히고 짓이겨진 뒤 볼품없는 갈색 조각이 되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은은한 향기는 선명하게 공기 속을 적시고 있었다.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글쟁이들의 글 이야기]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흰 잔에 물을 담았다. 수면이 흔들거리며 하얀 형광등 빛을 반사하다 천천히 멈춘다. 컵 안쪽에는 작은 공기방울 몇이 매달려 있다. 살짝 들어 냄새를 맡아 보려 했지만, 감기 때문에 섬세한 표현이 어렵다. 그냥 촉촉이 젖은 냄새가 난다. 목이 탔기 때문에 잔을 들고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입 안이 메말라 있어 단맛이 난다. 지하수이기 때문에 조금 거친 감이 혀끝에 느껴진다. 하지만, 서늘한 물은 열에 들뜬 입안을 식혀준다. 한결 편해졌다.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글쟁이들의 글 이야기]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다이어리 예전에 종이에 관한 사생문이 나와서 다이어리 표지를 묘사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 그 다이어리는 이년전에 구입했던 것이고 상당히 꼼곰하게 적고 있었다. 지금 쓰고 있는 다이어리는 작년 6월에 구입한 것으로, 6~8월 중순 까지는 상당히 열심히 적었지만 그 뒤로는 듬성듬성 하얀 백지가 더 눈에 많이 들어온다. 이 다이어리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쉼표하나 라는 글이 적혀 있다. 곰곰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편안해 보이는 엷은 녹색과 편안해 보이는 안락의자 위에 높인 작은 집, 그리고 쉼표 하나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어 집어들었던 것 같다. 다이어리의 재질은 최근 나오는 대부분의 만년 다이어리가 그렇듯 종이로 만들어져 있다. 첫장을 넘기자 '기억보조장치'라는 여섯 글자가 보인다. 이건 건망증이 심한 내가 ..
가스렌지의 불꽃왕관 불(火). 라이타불, 성냥불, 촛불 등.. 단, 불조심 유의하세요^^ 물론 맛은 안 보셔도 됩니다.. ;; 찻물을 올리기 위해 가스렌지로 다가가다 아직 나는 사생문을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서 가스렌지 불꽃을 관찰하기로 했다. 주전자에 물을 적당히 받고 렌지에 올린 뒤 번업! 탁, 탁탁탁탁 하는 소리가 나면서 붉은빛이 확 튀어 오른다. 완전연소가 되지 않아 희미한 가스 냄새가 퍼졌지만, 곧 사라지고 불꽃의 색도 푸른 빛으로 변했다. 주전자나 주전자를 지지하고 있는 네개의 철판을 날름날름 핥을 때만 간간이 다시 붉은색이 비칠 뿐이다. 일상적으로 따뜻한 불꽃이란 단어에 노란 색이나 붉은 색을 떠올리지만 사실 이 파랑색 불꽃이 더 높은 온도로 타오르고 있다. 거의 밖의 온도와 차이가 없는 ..
알약 얼핏 보면 마치 아몬드 초콜릿처럼 생겼다. 하다못해 색깔마저도 초콜릿 같은 진한 고동색이다. 폭 1cm, 길이 2cm의 럭비공 모양의 이 알약은 젤라틴 같은 거죽으로 감싸여 있다. 이 거죽이 포장재에 달라붙어버리는 바람에 캡슐을 꺼낼 때 상당히 고생을 했었다. 찰싹, 아주 살갑게 달라붙어버리는 바람에 긁고 누르고 찌부러트려도 모양만 변하지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결국 손톱 끝으로 잡고 끄집어내기는 했지만, 이렇게 성가셔서 어디 사먹겠냐고. 그렇게 긁고 누르고 찌부러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꼬집힘까지 당했지만 거죽이 튼튼한지 다시 원래의 럭비공 모양으로 돌아간 알약을 들고 천천히 살펴봤다. 옆면에 가는 실선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같은 재질의 판을 두 장 겹쳐서 만든 캡슐인 듯. 코끝으로 ..
가방 나에게는 몇 개의 가방이 있다. 가방에 대해서 글을 쓰라는 문장을 본 순간, 이 가방이 떠오른 것은 아마 내가 최근에 가장 자주 들고 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 녀석은 풀색으로 체크무늬가 염색된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다. 손으로 쓸어보자 오돌토돌한 요절이 걸린다. 크기는 제법 커서 서류 파일도 쉽사리 들어간다. 어깨끈과 가방의 안쪽은 연한 연둣빛이 도는 겨자색이다. 어깨끈은 몸통과 마찬가지로 가죽이지만, 우둘투둘하지는 않다. 가방의 안쪽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천으로 덧대어져 있다. 주머니가 양쪽 벽에 하나씩 있어 자잘한 물건을 넣기 편하다. 그리고 얄따란 지갑이 하나 안에 딸려 있는데, 난 여기다가 생리대를 넣어 다닌다. 양쪽의 주머니는 자주 열었다 닫았다 하기 때문이다. 다시 밖을 살펴보자. 이번엔 아..
선풍기 사생문을 쓰기 위해 선풍기를 찾았다. 장식장 옆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녀석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밝은 군청색. 군데군데 하얗거나 검은 긁힌 자국이 보인다. 게다가 먼지도 제법 많이 뒤집어쓰고 있어서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녀석의 목은 마치 교수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댕강 부러져서 힘없이 떨어져 있다. 부러진 틈바구니로 전선이 보인다. 빨강, 노랑, 하양. 간신히 그 전선들에 매달려 선풍기의 둥글고 무거운 머리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은 면한 상태다. 선풍기가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까닭은, 지난가을 판이 녀석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겁을 상실한 그야말로 개냥스러운 고양이는 선풍기를 캣타워로 착각이라도 한 것인지 그 육중한 몸으로 가녀린 산풍기의 머리..
리모컨 사생문을 위하여 일주일에 한두 번 만질까 말까한 리모컨을 찾았다. TV옆, 쇼파 위, 쇼파 위의 방석 밑…. 여기저기 뒤척거리다가 쇼파 앞 탁자 위에서 발견했다. 어수선하게 늘어놔져 있던 책과 신문지 덕분에 눈에 짤 띄지 않고 숨어있었던 것이다. 길이 한 뼘 정도 되는 이 리모컨이 길어 보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폭이 좀 좁은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손가락 두 마디 반 정도이다. 덕분에 그립감은 상당히 좋아 손에 꼭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네 개의 손가락으로 밑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는 자세가 잡힌 다랄까. 리모컨에는 여러 가지 버튼이 있는데, 이는 크게 세 부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위쪽에 있는 동그랗고 작은 버튼들. 각각, 전원, TV/외부입력, 숫자, 취침예약, 소리 줄임 버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