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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사생문

선풍기


  사생문을 쓰기 위해 선풍기를 찾았다. 장식장 옆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녀석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밝은 군청색. 군데군데 하얗거나 검은 긁힌 자국이 보인다. 게다가 먼지도 제법 많이 뒤집어쓰고 있어서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녀석의 목은 마치 교수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댕강 부러져서 힘없이 떨어져 있다.  부러진 틈바구니로 전선이 보인다. 빨강, 노랑, 하양. 간신히 그 전선들에 매달려 선풍기의 둥글고 무거운 머리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은 면한 상태다.

  선풍기가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까닭은, 지난가을 판이 녀석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겁을 상실한 그야말로 개냥스러운 고양이는 선풍기를 캣타워로 착각이라도 한 것인지 그 육중한 몸으로 가녀린 산풍기의 머리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선풍기가 생을 맏이  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순간에 불과 했다고 한다. 뽀각.

  아마 이 녀석은 다가올 여름에 제 역할을 할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 되지만, 아직 집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 이 집은 시골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이 녀석을 해치우려면 태우거나, 고물상에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플라스틱을 태우는 것은 꺼려지는데다가 최근 이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없이 바쁘다.

  아마도 이 녀석은 한동안 더 방치되어 있어야 할 운명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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