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깊은해구아래/소녀의 초상

소녀의 초상 2 - 그리고, '소년'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년은 책을 덮는다. 여린 입술을 타고 나오는 한숨.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티 없이 맑은 눈동자. 그에 어린 만월은 조용히 밤을 밝힌다.

  덮여진 책의 표지에는 빛을 발하는 듯 하얀 소녀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샘의 그림과 하나의 짤막한 문구가 자리하고 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두 개의 단어를 소리를 내어 읽어본다.


  샘의 소녀.


  여린 뺨을 붉게 상기시키고 소년은 책을 품에 끌어 않는다. 마치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곰 인형을 끓어 안듯 다정히. 이윽고 들어 올린 얼굴에 떠오른 것은 동화를 향한 동경.


  옷장에서 낡은 망토를 꺼내어 긴 수도복 자락위에 걸친 뒤, 소년은 낡은 나무문을 연다. 스산한 바람에 횃불이 일렁이며 자아내는 그림자 사이로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달그락거리는 나막신을 벗어들고. 한 발, 또 한 발 한 발. 긴 복도 끝 가파른 돌계단을 지난다.


  그리고 나타난 흰 대리석 문을 열고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뛰어든다. 거침없이.


  달이 만들어 내는 환상은 숲의 그림자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소년의 발이 디디는 곳 마다 손을 뻗어오는 검은 그림자. 허나 소년은 그 눈동자에 달의 빛을 새겨 넣은 듯 빛내며 오직 앞만을 바라보며 어둠을 해치고 달린다. 결코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고.


  나뭇가지에 긁혀 옷가지가 찢어지고, 작은 상흔들이 손발에 가득해진 후에 마침내 샘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허나 그것은 초라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질척거리는 진흙과 이끼에 뒤덮여 있다. 그곳에 소년이 찾던 심원의 샘은 존재 하지 않았다. 또한 소녀 역시. 마치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던 아름다운 환상처럼 소름끼치는 현실만이 그 자리에 존재 할뿐.


  한 방울, 공허를 품은 물방울이 여린 눈가에 아롱졌다 어둠속으로 흩어진다. 소년은 고개를 떨어뜨린다.


 상실감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막 돌아 서려는 찰나, 소년은 기척을 느끼고 호수 뒤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본다. 겁에 질려 잔뜩 웅크린 채, 넝마 조각 같은 옷을 끌어당겨 작은 몸을 감싼 소녀를. 그 눈에 담긴 공포와 절망, 그리고 슬픔을.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메마른 소년의 가슴으로 스며들어 온 것은 난폭한 상념. 소년은 깨닫고 말았다.


  윙윙 울리는 바람에 삐걱거리는 문 안쪽에서 남자는 짐승같이 헐떡이며 여린 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리 눌렀다. 어둡고. 어둡고, 어둡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숲 속의 허물어져 가는 나무 우리만이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였기에, 아이는 문을 나섰다가도 다시 제 발로 걸어 들어오곤 했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올쯤이면 가슴을 할퀴는 추위는 더욱 심해진다. 조금이나마 온기를 가지고 싶어 나뭇잎을 쌓아 그 속안에 숨어 그대로 잠들기를 바랐던 날들이 며칠이던가. 허나 해가 지면 어둠에 쫓기어 도망치듯 우리 안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몇 번이고 작은 심장에 상처를 입혀 왔던가. 영원히 이어 질듯 한 그러한 날들이 붕괴된 것은 어느 눈보라 일던 날. 쉭쉭 거리는 바람 속에서도 선명히 울리는 늑대들의 으르렁 대는 소리와 멀어져 가는 비명 소리는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날 밤. 소녀는 얼어붙은 샘에서 그림자에게 먹혔다.


  소년은 흐릿한 달그림자 아래에 미동도 않고 멈춰서 겁에 질린 앙상한 몸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등을 돌려 숲 밖을 향해. 자신이 알고 있고 속해있는 세상 속으로. 결코 뒤 돌아보는 일 없이.


  그리고 ‘소년’은 두 번 다시 숲으로 돌아오는지 않았다.  

'깊은해구아래 > 소녀의 초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녀의 초상 5 - 열매  (0) 2008.04.03
소녀의 초상 4 - 식[蝕, eclipse]의 기사  (0) 2008.04.01
소녀의 초상 3 - 그날  (0) 2008.03.29
소녀의 초상 1- 옛날에  (2) 2008.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