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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소녀의 초상

소녀의 초상 5 -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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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하얀 신의 집에 작고 하얀 바구니가 버려진 것은 스산한 바람에 나무들이 그 잎을 떨어뜨리는 계절이었습니다.


바구니를 발견 한 것은 하얀 옷을 입은 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 그는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고, 그 안에 갓 태어난 아기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기는 하얀 집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틈에서 하얀 옷을 입고 자라나게 되었지요.

아이는 자신이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하얀색 말고 다른 색의 옷을 입은 사람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이 입은 옷의 색을 하얗다고 부른다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깊은 밤, 아이가 하얀 옷을 입고 막 하얀 천이 깔린 침대에 누워 막 잠을 이루려 하는데, 창문 너머 어른거리는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기척도 없이 검은 옷을 입은 검은 사람이 걸어 들어왔습니다. 한 번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본적 없었던 아이는 너무나 무서워 눈을 꼭 감고 잠이 든 척했습니다.

아이가 용기를 내어 눈을 뜬 것은 잠시 후. 둘러본 방 안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고, 대신 창가에는 낡은 책 한권이 달빛을 받으며 놓여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바라본 표지에는 빛을 발하는 듯 하얀 소녀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샘의 그림과 하나의 짤막한 문구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샘의 소녀.

그리하여 아이는 가슴속 깊이 소녀를 그리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무엇이라 부르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허나 그것이 불씨와 같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소녀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은 따스해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따스함은 점점 커져만 으니까요.

마침내 그 작은 가슴이 온통 소녀로 가득 차 그 빛이 넘쳐흐르게 된 어느 날, 소년은 처음으로 하얀 집을 나서 나무 그림자가 일렁이는 숲 안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심술궂은 나무 그림자들이 그 뒤를 따라가며 옷자락을 당기고 팔 다리를 할퀴려 했지만 소년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불씨로 가득한 작은 심장은 금방이라도 타올라 한줌의 재만 남아 버릴 듯 했으니까요. 하늘에 빛나는 하얀 달님을 표식으로 삼아 하얀 옷을 걸친 소년은 검은 그림자 사이를 바람처럼 달렸습니다.

이윽고, 소년은 샘을 발견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끼투성이 진흙 구덩이에 불과 했지요. 어디에도 하얀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깊이 상심하여 소년이 막 돌아서려던 찰나, 눈에서 시린 물방울이 하나 떨어져 내려 가슴팍을 적셨습니다. 그것은 순식간에 스며들더니 아주 작은 씨앗 하나만을 남기고 심장을 꽁꽁 얼려버렸습니다.

눈앞을 밝히던 빛이 사그라지자 소년은 자신이 어둠 속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웅크리고 있는 회색 옷의 상처투성이 아이와 눈이 마주쳤지요.

그 순간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회색 옷도, 상처를 입은 사람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기에 그저 두렵기만 할뿐. 왜 도망치고 있는지 그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감히 뒤를 돌아볼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하고 소년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서 마침내 세상의 끝자락까지 도망쳤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끊임없이 펼쳐진 하얀 모래의 땅. 한모금의 물도, 서늘한 나무 그늘도 없는 곳.

갈증도, 더위도 소년에겐 모두 처음 겪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힘들고 지쳐서 깊이 잠이 들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가득했지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가슴에 스며든 차가운 물방울이 그것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뜬 하얀 달의 조각 아래서 소년은 작은 샘을 발견 했습니다. 기쁨에 들떠 달려갔던 소년은 그 안에서 볼품없는 회색 옷을 입은 상처투성이 아이의 모습을 발견 했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 돌아 서려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아아, 그래. 그랬구나. 그 아이는 다만 힘들고 너무나 아팠던 거야.]

그때 소년의 눈에 물기가 어리더니 눈물 한 방울이 가슴으로 스며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따스한 것이었습니다. 그 온기는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고 가슴속 깊이 숨어 있던 씨앗의 싹을 틔웠습니다. 싹은 곧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우더니 열매를 맺었습니다.

[돌아가자.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그리고 이 열매를 나눠 주는 거야.]

소년은 달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의 가슴도 따스해 질 거야,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