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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소녀의 초상

소녀의 초상 3 -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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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늪 속에 서서히 가라앉아가는 나비처럼, 어둠 속에 숨어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소녀에게 내가 그리 말한 것은, 그리고 소녀가 그리 답한 것은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굶주린 짐승마냥 늪가를 서성이고 있었으며, 소녀 또한 몇 날 며칠이고 그것을 지켜보아 왔으므로. 그 남자가 소녀를 가둘 우리로 이 숲을 택한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 이루어지도록 이미 결정 지워져 있던 것이다.

  만월이 떠오른 밤. 나는 홀로 남은 소녀를 유혹했다. 그녀 스스로가 나를 원하도록, 여린 품안에 이 흉폭한 기운을 품을 수밖에 없도록. 영혼에 새겨진 고독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몇 번이고 헤집어.


  그 순간 그녀가 떨고 있지 않더냐고 묻거든 나는 아니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그 어둠을 품은 눈동자는 모든 것을 꿰뚫을 듯 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오히려 떨고 있었던 것은 나였다. 비록 그 영혼이 상흔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들 어둠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하얀 달의 파편같이 아련한 미소 앞에서 감히 그녀가 약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 나는 매혹되어 있었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어둠이이 그러 했을 것이다.


  그날, 어둠이 미쳐 날뛰고 있던 그 순간, 댐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쏟아져 나오는 이매망량들은 제가 뛰쳐나온 곳이 어디 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에게 문이란 옛날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무지개의 끝자락과 마찬가지였으니. 허나 이윽고 그들은 숲의 그림자 사이로 스며들어 본능적으로 생기를 탐하였고 살아 있는 것들을 농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중에 오직 그 작은 샘만이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결국 그 어떤 어둠이라 해도 달의 하얀 빛 없이는 존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날들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왔다. 하얀 옷을 입은 사자. 그 손에 하늘의 법도를 받잡아 모시고 내딛는 걸음은 곧고 바랐으니 신의 울타리 안에서 숲은 다시금 침묵하게 되었다.


  아는가. 고인 물은 결국 썩기 마련이다. 달은 태양의 빛이 없이는 초라한 깨어진 거울에 불과하다. 샘은 서서히 말라갔고, 문의 불안정한 삐걱거림에 어둠은 서서히 미처 날뛰기 시작했지. 그래서 내가 그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그녀에게 고독에서 영원히 해박시켜 주겠노라고 약속 한 것은 나였으니.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찾아오리라곤 생각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어린 소년이 그 어둠을 파하리라곤…. 소녀가 달이라 한다면 소년은 태양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세상을 뒤덮는 편견 없는 빛 앞에 그림자는 오직 숨을 수밖에 없는 법.


  허위도 허식도 그 앞에서는 모두 거짓임이 드러나고 남은 진실의 조각을 마주 하였을 때 소년은 등을 돌려 숲을 떠났다. 도망치듯 다급한 걸음으로. 그 작은 소녀를 홀로 남겨두고.


  이제 그대가 알고 싶어 하던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허면 나는 이제 묻겠다. 그대여, 이 숲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