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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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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체 첸지의 초상 스탕달 신드롬의 기원으로 알려진 그림이지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 22세에 짧은 생을 끝마친 여인입니다...
소녀의 초상 5 - 열매 작고 하얀 신의 집에 작고 하얀 바구니가 버려진 것은 스산한 바람에 나무들이 그 잎을 떨어뜨리는 계절이었습니다. 바구니를 발견 한 것은 하얀 옷을 입은 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 그는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고, 그 안에 갓 태어난 아기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기는 하얀 집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틈에서 하얀 옷을 입고 자라나게 되었지요. 아이는 자신이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하얀색 말고 다른 색의 옷을 입은 사람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이 입은 옷의 색을 하얗다고 부른다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깊은 밤, 아이가 하얀 옷을 입고 막 하얀 천이 깔린 침대에 누워 막 잠을 이루려 하는데,..
소녀의 초상 4 - 식[蝕, eclipse]의 기사 검에 어린 빛이 서늘한 궤적을 만들어낸다. 이윽고 붉은 액체가 거칠게 대기 중으로 튀어 오르고, 매끄러운 갑옷 표면위에 붉은 얼룩이 늘어난다. 허나 그는 피를 뒤집어쓰고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다시금 검을 내리 긋는다. 등 뒤에서 덮쳐오는 기색을 느끼자 상체를 회전시켜 적의 공격을 피하며 팔꿈치로 다가오는 머리를 내리찍는다. 이윽고 허물어진 상대의 등에 검을 박아 넣은 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뽑아들고는 왼쪽에서 크게 베어오는 남자의 품속으로 흘러든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겨드랑이에 치명적인 상처를 새기자 다시금 피가 쏟아진다. 눈가로 뿜어진 피를 살짝 고개를 돌림으로써 피하자 그것들이 고스란히 뺨 위를 물들인다. 허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적들을 베고, 베고,..
소녀의 초상 3 - 그날 그날, 늪 속에 서서히 가라앉아가는 나비처럼, 어둠 속에 숨어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소녀에게 내가 그리 말한 것은, 그리고 소녀가 그리 답한 것은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굶주린 짐승마냥 늪가를 서성이고 있었으며, 소녀 또한 몇 날 며칠이고 그것을 지켜보아 왔으므로. 그 남자가 소녀를 가둘 우리로 이 숲을 택한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 이루어지도록 이미 결정 지워져 있던 것이다. 만월이 떠오른 밤. 나는 홀로 남은 소녀를 유혹했다. 그녀 스스로가 나를 원하도록, 여린 품안에 이 흉폭한 기운을 품을 수밖에 없도록. 영혼에 새겨진 고독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몇 번이고 헤집어. 그 순간 그녀가 떨고 있지 않더냐고 묻거든 나는 아니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그 어둠을 품은 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