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金顯承, 1913.4.4~1975.4.11)은 눈물과 보석과 별의 시인이다. 시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는 모더니스트와 이미지스트의 면모를 보였고, 그 뒤로는 한국 시단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 시인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그는 맑고 밝고 선명한 이미지들을 통해 정신의 명증성과 함께 높은 종교적 윤리성을 추구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또한 1969년에 시집 [견고한 고독]을 내놓으며 초기의 감상주의를 배제하며 ‘견고한 고독’ 속에서 더욱 깊고 진지한 윤리적 실존의 자세를 끌어낸다. 그의 시는 서구 기독교의 오랜 전통인 청결한 윤리의식과 한국의 지조와 절개를 중히 여기는 선비정신이 혼합돼 독특한 정신주의를 구현한다.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희지 않는 마를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에 스며 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김현승, ‘견고한 고독’, <현대문학>(1965. 10)- 시집 [견고한 고독](1968)에 수록
김현승은 커피중독자로 여겨질 만큼 유난히도 커피를 좋아해 호도 ‘다형(茶兄)’이라고 지었을 정도다. 그는 1913년 평양의 한 엄격하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목사인 부친을 따라 어린 시절을 제주도, 광주 등지에서 보낸다. 광주에서 미션 계열인 숭일소학교를 마치고 부모와 떨어져 형이 있는 평양의 기독교 계통인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스포츠와 영화,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특히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의 ‘피파의 노래’를 읽은 뒤 그 감동에 젖어 시를 습작하기 시작한다. 그 습작의 결과 교지 <숭실>에 시 ‘화산’을 게재하는 등 일찍부터 문학에 대한 재능을 드러내 보인다. 1932년 숭실중학교와 같은 재단인 숭실전문 문과에 입학한다. 그는 이 숭실전문의 교사로 있던 양주동, 이효석의 강의를 들으며 한층 더 창작욕을 불태우며 습작에 몰두한다.
하지만 1933년 위장병 때문에 부득이 학업을 중단하고 부모가 있는 광주에 내려가 요양을 하기도 한다. 몸을 추스르고 다시 복교한 그는 본격적으로 시 작업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겨울방학이 되어서도 기숙사에 혼자 남아 “북극의 안개 속에서 값싼 커피를 마시고” 밤늦도록 시를 쓴다. 그때 쓴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등의 시들을 교지에 발표하는데, 이것이 스승인 양주동의 눈길을 끌었다. 양주동은 이 시들을 1934년 <동아일보> 문예란에 발표하게 함으로써 김현승은 문단 등단의 관행인 신춘문예나 잡지추천 제도와 상관없이 문단에 나오게 된다.
1935년 <조선시단>과 <동아일보> 그리고 교지 <숭전> 등에 ‘묵상수제’, ‘유리창’, ‘철교’, ‘이별의 시’ 등을 발표하는데, 이 무렵의 시들은 식민지 시대의 궁핍하고 어두운 시대에서 고통 받는 민족의 비애를 낭만적인 자연예찬과 인간의 탐구정신 속에 녹여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시어들은 깨끗하고 투명하며, 때로는 지나치게 세련되고 지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의 성향을 보인다. 비평가 홍효민은 같은 해 <신동아> 연말 시단의 총평에서 김현승을 ‘혜성처럼 나타난 시인’이라고 극찬을 하고,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도 그에게 격려와 찬사를 보냄으로써 그의 이름은 일찍부터 시단에 알려졌다. 1936년경 위장병의 재발과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폐쇄되는 사태가 일어나자 김현승은 졸업을 1년 남긴 채 광주로 돌아와 모교인 숭일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교편을 잡고 있던 숭일학교의 신사참배 거부 사건에 연루되어 학교에서 파면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광복과 더불어 광주 <호남신문>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모교인 숭일학교로 자리를 옮겨 교감으로 취임한다. 그는 교육자로서의 직책에도 충실하지만 시작도 게을리하지 않아 이 무렵 <경향신문>을 비롯해 여러 신문, 잡지에 ‘내일’, ‘민성(民聲)’, ‘창’, ‘조국’, ‘자화상’ 등과 같은 시편을 발표한다. 1948년 무렵에는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 등과도 교류하면서 문단활동의 폭도 넓어진다. 1950년에 ‘생명의 날’, ‘가을 시첩’ 등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그는 인간의 고독이나 허무 같은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나고 자라면서 줄곧 그의 정신형성에 영향을 미쳐온 것 중의 하나가 기독교다. 그의 시 속에 절대적 타자인 신을 확인하고 그에게 더 가까이 가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서 배태된 높은 윤리성의 실현을 하나의 실존의 과제로 삼고 그것을 생명·순결·진실 등의 관념 속에 수렴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 나 자신이 주일예배 시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나의 자식들에게 엄격히 할 수는 없었다. 나 자신이 주일이면 술을 즐기는 문인들을 내 집 응접실에 불러들이면서 나의 자식들에게 금연과 금주에 엄격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 김현승, ‘종교와 문학’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 광주에서 박흡, 장용건, 손철, 이동주 등과 더불어 계간지 <신문학>을 창간하기도 하고, 이듬해 4월에는 조선대학교 교수로 임명된다. 당시 전쟁의 충격으로 피해망상증과 정신분열 등에 시달려 광주로 내려온 서정주에게 자신의 학동집 바깥채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그를 조선대학교 부교수 자리에 앉도록 알선해주는 등 온정을 베푼다. 그러나 그 자신은 네 살 난 아들이 병을 얻지만 전쟁으로 인한 물자 빈곤과 가난 때문에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잃게 되는 비극을 겪고, 그의 시 ‘눈물’은 이때의 애통함을 빚어서 완성한 시다. 1955년에는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고, 제1회 ‘도문화상’을 수상한다. 1957년에는 그동안의 시들을 모아 첫 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를 발간하고, 이듬해에 제1회 ‘한국시인협회’ 수상자로 결정되지만, 수상을 거부해 화제가 되기도 한다.
1963년 김현승은 두 번째 시집 [옹호자의 노래]를 간행한다. 그는 여전히 욕심 없는 가난한 마음으로 주변과 사물들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시적 자세를 보이지만, 나날이 혼탁해가는 정치현실에 대해서도 서서히 관심을 드러낸다.
모든 우리의 무형(無形)한 것들이 허물어지는 날 모든 그윽한 꽃향기들이 해체(解體)되는 날 모든 신앙(信仰)들이 입증(立證)의 칼날 위에 서는 날, 나는 옹호자(擁護者)들을 노래하련다!
이 시에서 그는 우리의 내면과 정신의 평정을 깨트리는 어지러운 현실적 조건들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던 것이다. 1964년에는 숭실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1965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시 분과위원장에 피선된다.
1968년에 세 번째 시집 [견고한 고독]을 내놓는다. 이 시집은 신의 불가지성(不可知性)·무한성·영원성에 대비되는 인간의 근원적 허무의 자각에서 비롯된 고독의 발견을 노래한다. 김우창은 이 시기의 김현승의 시 세계에 대해 “이러한 종교적(宗敎的) 추구(追求)는 어려운 시대에 있을 수 있는 하나의 정신 자세를 나타내준다. 정신이 상실된 시대에서, 정신은 시대의 얼굴을 직시(直視)함으로써 스스로의 우위(優位)를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시각(視覺)의 명증성(明證性)은 그대로 명징한 정신세계를 증언하는 것이 아닌가.(……) 시대를 보는 정신(精神)의 명증성은 곧 시대를 거부하는 강력한 내면의 의지가 된다.”라고 말한다. ‘견고한 고독’은 어지러운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홀로 맞서는 ‘시대를 거부하는 강력한 내면의 의지’로 ‘하나의 정신 자세’였던 것이다. 1970년 네 번째 시집 [절대고독]에서도 이 고독의 탐구는 계속된다. 이 무렵 <현대문학>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며 이론서 [한국 현대시해설]을 간행한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에 3선 되고, 숭전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역임한다.
1973년 [김현승 시전집]을 출간하고, ‘서울시문화상’ 예술부문을 수상한다. 이해 3월 하순, 차남의 결혼식을 치르고 나오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가 한 달 만에 겨우 회복한다. 이 뒤로는 거의 시작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신앙에 전념해 병원과 교회를 오가는 생활을 한다. 평생을 가난과 벗하며 시인과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던 그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다시 숭전대학교에 강의를 나갔다가 1975년 4월, 채플시간에 쓰러지며 63년의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