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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르고 건조하니까 그곳으로 흘러가는거야. 천천히 조금씩 넘치지 않게 갈라진 흙 사이로 온전히 스며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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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의 오빠 하루.
의대생.
나루보다 세살 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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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율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본관을 벗어나 별관으로 향하는 짤막한 오솔길로 들어섰다. 요철진 바닥엔 떨어진 하얀 꽃잎이 비 온 뒤 물이 그러하듯 고여 있다. 하얗고 보드라운 길 위를 약간은 시린 바람과 매끄러운 꽃잎을 맞으며 나아가는 동안 나루는 조금씩 걸음이 늦춰지곤 했다.
  "김나루?"
  그럴 때마다 운율은 몽롱하게 서 있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러면 그녀는 마치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이 정신을 차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별관이라 불리는 그 건물은 이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복도와 계단은 아직도 나무로 짜여 있었다. 미술실은 발을 디딜 때마다 살짝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이 층 복도 초입의 왼편에 있었다.
  운율이 익숙한 동작으로 문을 밀자, 열어두고 나왔던 창문을 통해 청량한 공기가 복도까지 흘러넘쳤다. 그는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섰지만, 나루는 쉽사리 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녀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꽃이 가볍게 흩날리던 교정을 걷던 때의 몽롱함은 이제 찾아 볼 수 없었다. 커다랗고 부드러운 검은 눈동자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어색해 보이는 나루를 향해 그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이곳에 데려와 좀 놀란 모양이구나.”
  그는 그녀가 왜 멈춰 섰서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보다 더 부자연스러운 '고요함'이 있을까. 지나칠 정도로 정화된, 부정한 것은 조금도 발붙일 틈을 주지 않는 공기.
  모든 것은 운율이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어떠한 그림자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묶어둔' 것에서 비롯되었다. 금빛 먼지나 새의 날갯짓, 작은 벌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넘나 들 수 있지만, 어둠만은 미세한 조각 하나조차 스며들지 못한다. 이곳은, 미술실은 온전히 살아 있는 것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는 나루에게서 몸을 돌려 볕이 스며드는 창가로 몇 발자국 걸어갔다.
  “이곳에 바라보면 학교 전물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모두 살필 수 있지.”
  나루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그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아까 네가 이 학교에 들어오는 모습도 다 지켜봤다는 말이야. 저기 저 나무 근처에 한참을 서 있던데….”

 “아….”

 “벚꽃이라도 보고 있었니?”
 나루는 잠시 운율의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미술실 안으로 걸어 들어와 창가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조용히 그 밖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다. 따뜻한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벚나무 둥치, 그 아래의 그늘진 곳.
  소녀는 입을 열었다.
  “…좋아하니까요.”
 그리고 한 번 더 부드럽게 속삭이듯 읊조렸다.
 “좋아하니까, 그래서 보고 있었어요.”
 순간, 그녀의 목소리에 겹쳐서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말이 울렸다.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된단다.’
 잊고 있었던 다정한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다.
 ‘보이지 않으면 저런 것들은 금세 잊혀 진단다. 그러니 저들에 대하여 잊을 때까지 눈을 가리고 있는 거야.’
 그 말대로 어린 시절, 운율은 눈을 가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기억을 봉하였고 그들을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한데 조모의 부재를 들은 순간 어찌하여 그것들은 다시 기억해낸 것일까.
 상냥하게 두 눈을 가리던 주름진 손의 기척이 되살아난다. 그 순간 느꼈던 것은 평온함과 안도감, 그리고….
 
 “하, 하하…. 그래, 좋아하기 때문이라 그거지….”
 그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네? 선생님?”
 의아해하는 나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아아, 아니다, 아무것도.”
 얼버무리듯 대답한 그는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나. 마치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온 달처럼 흐릿함이 가시고 시린 빛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친다. 투명하고 맑고 깊은 호수와 같은 소녀의 눈동자와 얼어붙은 거울같이 서늘한 눈빛이 얽혀든다.
 정결하고 고요한 교실을 중심으로 묘한 일렁임이 일었다. 결코 선 안을 넘어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낮게 속삭이는 듯한 기척이 창틀 밖, 복도와 교실 문틈을 쓰다듬는다. 그것은 마치 작은 샘에 던져진 돌의 파문처럼 넓게 퍼져가다 이윽고 조용히 가라앉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고요해지자 운율이 입을 열었다.
 “우선 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는 그녀의 그림을 책상 위에 펼쳐놓는다.
 “보아하니 솜씨가 상당하더구나. 혹시 예전에 미술을 배운 적 있니?”
 머뭇거리며 나루가 답했다.
 “아니요, 그냥 취미로 조금….”

 조심스럽게 살피는 시선을 무시하며 운율이 다시 물었다.
 “아직 특활은 어디에 들지 생각하지 않았지?”
 “네”
 “미술부에 들어오는 건 어때?”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나루가 되물어왔다.
 “미술…부요?” 

 “그래.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이쪽 방면으로 재능이 있어 보여서 하는 말이야."
 웃음기 섞인 어조로 그가 말했으나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말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소녀가 다시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좀 더 현실적인 일들을 그리는 것이 현명한 처신일 거다.”
  나루가 당황해 하며 의중을 재어보려는 듯 운율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그는 표표해 보이는 얼굴로 책상 위에 있는 아름다운 귀화(鬼畵)를 주시할 뿐.
 "뭐, 자세한 건 피차 천천히 알아 가면 되겠지.”
 도화지 위에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새하얀 벚꽃, 소년과 여인, 그리고 꽃그늘 아래 웅크린 검은 그림자들이 그려져 있었다. 하얀 꽃잎들의 품 안에서 그림자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평온하고, 고요하게.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글쟁이들의 글 이야기]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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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 울리기 무섭게 복도는 재잘거리는 아이들로 가득 찼다. 운율은 어수선한 공기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이사장실은 두 층 위, 본관의 제일 으슥하고 구석진 자리에 있었다. 대부분의 교직원들은 가기 꺼려하는 곳이다. 그의 아지트는 몇몇 수상해 보이는 물건들과 일부 악취미적인 책들, 그리고 서류더미로 들어차 있다. 진검인지 모형인지 모를 벽에 장식된 낡은 칼은 둘째치더라도 기묘한 모양의 탈에서 억지로 시선을 돌려 책꽃이에 관심을 쏟던 방문객은 알 수 없는 검붉은 얼룩진 가죽 책들을 발견하곤 도망치듯 그 방을 빠져나가곤 했다.

  그런 그의 사무실에서도 그나마 소박하고 편안한 -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정상적이라 할 수있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이사장실의 문에 걸려있는 open/close 문패였다. 오일 파스텔로 화사하게 작은 꽃과 블루베리가 그려진 문패는 소문에 의하면 이사장의 와이프의 작품이라고 했다. 사실 문패는 너무나 소박하고 정상적이어서 사람들이 실내의 안쪽의 지나친 기과함에 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패는 Close 쪽이 위로 향한채 걸려져 있었다. 그러나 운율은 무시했다. 그 문패가 open 쪽으로 돌려져 있는 경우는 기껏 해야 외부 손님이 사전에 약속을 잡은 뒤 방문하는 날 정도였으니. 

  “영감.”

  마침 갓 우린 따끈한 녹차를 입에 가져대던 이사장은 기미도 없이 벌컥 열린 문에 놀라 뜨거운 차를 그대로 들이키고 말았다. 그러나 운율은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말거나 자신의 용건을 늘어놓을 뿐이다.

  "잘도 저런 아이를 찾아냈군."

  조금 전의 사건으로 위엄은 손상되었으나 뻔뻔함만은 건재한 이사장은 맨질맨질한 얼굴로 운율을 바라봤다.

  "왜 그런가, 운선생?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

  "학생들을 수집하는 이상한 취미에 내가 장단을 맞춰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 하는데."

  운율은 냉정히 잘라 말했지만 이사장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후후후, 자네도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지 않나? 가르치기 싫다 그건가?"
  "……."

  대답 대신 침묵이 돌아오자 이사장은 능글맞게 웃었다.

  "그 애 그림을 봤구만?"
 
  운율은 대답 대신 질문은 던졌다.

  "어디서 발견한 거야?"

  이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지난 달, 각 학교 이사들 간이 모임이 있었던 거 기억하지? 거기 왔던 송이사가 말하더군. 자기네 학교에 있는 기묘한 아이에 대해서."

  그리고 운율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자네쯤 되어야 저 아이를 평범하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했지."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자, 수업 시작 하겠네. 어서 내려가 보라고. 예체능 전담 교사는 복수전공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놀고먹는 다는 말 듣기 쉽상이니."
  "방과 후에 다시 오겠어."

  그때쯤이면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그가 도망치고도 남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운율은 엄포를 놨다다.
  돌아 서는 그를 향해 이사장은 손을 흔들어 줬다.

  운율이 교실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쉬는 시간이 끝나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아쉬운 아이들은 아직도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 고 있었다. 나루도 몇몇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전학생이란 호기심을 자극 하기 딱 좋은 소제이니.

  "주목. 쉬는 시간은 끝났다. 이제 수업을 계속해야지?"

  그의 말에 아이들은 아쉬워 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기 시작했다. 나루와 함께 있던 아이들역시 서둘러 자리를 떴는데, 그러면서도 인사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 제법 친해진 것인지 얼굴에는 허물없는 미소를 띠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우정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물건인가. 인간이란 자신과 다른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비정상적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내밀어진 손과 친근한 미소, 다정한 말 한마디는 거부와 혐오로 탈바꿈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명한 처신이다.

  다시 정적이 교실에 가득 찼다.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봄의 나른한 날씨에도 금새 수업에 빠져 들었다.

  그는 천천히 아이들 사이를 돌아가며 그림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교정에 꽃들이 만발한 모습을 그렸다. 다채로운 상상력은 그 사이에서 놀거나 걷고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펼쳐졌다. 개중에는 시선이 갈 만큼 제법 실력이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간혹 한 두 녀석 만이 전혀 엉뚱한 상상화를 그려두었거나 두족화 수준의 그림을 그리며 끙끙거리고 있을 뿐 이었는데, 웃고 있는 꽃 하나만 그린 녀석에 이르러서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운율은 나루의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용히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따스하고 아름다웠지만, 운율은 꽃의 그림자 너머에 숨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독기 어린 집착과 서늘한 냉기를.

 “창 밖에 뭐가 있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율이 질문을 던지자 그제야 그가 가까이에 온 것을 알아차린 나루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보았다.

 “아, 선생님.”
 “…상당히 주의 깊게 바라보던데.”

 그녀는 살짝 멋쩍은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 네….”
 “흐음.”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도화지를 내려다보았다. 미미하게 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김나루 맞지? 그림을 들고 잠시 따라오너라.”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는 동안 운율은 반장을 향해 말했다.

 “반장, 수업 시간 끝나면 그림을 모두 모아서 미술실로 가져와라.”

  그리고 성큼성큼 교실을 걸어 나갔다. 나루는 머뭇거리다 아이들이 수근 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며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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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득.

  꾀꼬리는 아슬아슬한 순간 날아올라 날카로운 손아귀에서 하늘로 도망쳤다. 그러나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깃 몇 개가 뜯겨져 흩날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깊고 푸른빛 사이로 연분홍 꽃잎과 선명한 노랑 빛 깃털이 흔들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노획물 대신 허공을 휘저은 나비는 매끄럽게 몸을 비틀어 땅위로 내려섰다. 그리고 무심 한 듯, 새가 날아간 하늘은 돌아도 안보고 머리카락과 구겨진 치맛자락을 정리한다. 하지만 몸짓에 담긴 신경질 적인 기운마저 지우지는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던 운율은 무심결에 하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여전히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흰 뺨을 부드럽게 이완되어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소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비어 있던 하얀 도화지 위에 선들이 그어진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날개 달린 소년, 그리고 그 아래 매달리듯 손을 뻗는 우아한 여인의 윤곽이 조금씩 들어난다.

  이제 운율은 확신 할 수 있었다. 역시 저 소녀는 주변에 영향을 끼치기만 할뿐이 아니라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아주 선명하게.

  그때 종이 울렸다. 운율은 안경을 집어 들었다. 다시 렌즈 너머로 모든 것이 고요히 가라앉자 그는 천천히 일어나 교탁 앞으로 다가갔다.

  “자 쉬는 시간이다. 수업은 10분 후에 다시 시작하자.”

  말을 마친 운율이 몸을 돌리기 무섭게 아이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전학생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10분간, 교실은 교사들의 지배 영역이 아닌 아이들의 것이다.

  운율은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이사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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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각, 사각.

  상념에 젖어있던 그는 문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시계 바늘은 제법 많이 움직여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고 미간을 문질렀다. 도수 있는 렌즈가 아니지만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투명한 렌즈 너머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어린 시절, 안경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그것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서였지만, 좀 더 자라서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안경을 쓰는 것은 볼 필요가 없는 것까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일단 시선에 들어오면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 주의를 끄는 강한 힘이 있다. 그는 성가신 일에 얽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나루가 있는 방향을 항해 시선을 보냈다. 소녀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 풍경에 마음을 빼않긴 듯 오른 손에 들린 연필은 도화지의 한 지점에 멈춰서 있었다. 부드러운 회색의 음영들이 화사하게 펼쳐지다 정체되어 있다. 그림이 끝난 곳은 소녀의 시선이 향한 바로 그 풍경이었다. 

  운율은 소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향해 둘러보았다.

  연두 빛 싹이 돋아나는 보드란 나무 가지에 갈색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앉아 있었다. 아니, 가지 위를 오르다 멈춰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동그란 무릎은 가지의 굴곡에 부드럽게 걸쳐져 몸을 지탱하고 있었고, 손은 조금 더 위의 가지위에 올려져있다. 봄의 초록을 닮은 녹색 눈동자가 향해 있는 곳은 그 보다 더 위쪽.

  그곳, 바로 나무 꼭대기에는 자그마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마르고 가벼워 보이는 몸은 노랑 빛의 깃털로 치장되어있었다. 깃털의 끄트머리는 깔끔한 검은색이다. 그리고 소년의 눈가 역시 우아한 검은색 무늬로 뒤덮여 있었다. 눈꺼풀 위에서 시작된 그 무늬는 관자놀이 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생기 있어 보이는 주홍색 입술은 명랑하게 움직이며 높은 음조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휙, 휘리리릭, 휘릭.

  소년을 바라보는 나비의 입술이 살짝 들어 올려 지며 파르르 떨린다. 그 사이로 날카로운 윗니와 아랫니가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딱, 딱, 딱딱. 날카롭게 울리는 채터링.

  나비의 가녀린 팔이 좀 더 높은 쪽의 가지를 잡는다. 부드럽게 휜 발목은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것 같이 당겨져 있었다. 청명히 울리는 새소리 사이로 긴장으로 물든 정적이 이어진다.

  그것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나뭇잎은 소년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나비는 우아하게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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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율은 다시 교사용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빛이 나른히 하얀 도화지위로 쏟아진다. 얇은 유리창을 두드리는 바람은 아직 서늘한 감이 남아있지만, 교실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한다. 금싸라기 같은 볕만이 창가를 따스하게 데울뿐.

  운율은 무의식중에 안경을 쓰다듬었다. 한기를 막아주는 창문의 모습과 그의 ‘볼 수 있는’ 눈을 봉(封)하는 안경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비슷했다.

  돌이켜 보니 안경을 쓰기 시작한지 벌써 20여년이나 흘렀다.
 
  뇌리에 다정한 한마디가 떠올랐다.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된단다.’

  그것은 오래전 세상을 뜬 조모가 그에게 해주었던 말.  

  어린 시절 보아서는 안 될 것이 보는 것으로 인해 고통 받던 때. 그의 부모는 이형(異形)을 보았노라는 아들의 고백을 단지 철없는 어린아이의 거짓말로만 대했었다.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자 그는 다시는 누구의 이해도 구하지 않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맹세를 했다. 그리고 홀로 두려움과 고독을 피해 이불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에게 조모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괴롭다면 차라리 눈을 가리려무나.’

  주름지고 부드러운 손이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와 소년의 눈을 덮었다. 마치 유리 세공품이라도 만지는 듯 상냥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순간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히 가라앉았던 것을 그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침내 운율이 안정을 되찾자 조모는 어디선가 긴 천을 가져와 그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따스하게 그를 위로했다.

  ‘보이지 않으면 저런 것들은 금세 잊혀 진단다. 그러니 저들에 대하여 잊을 때까지 눈을 가리고 있는 거야.’

  그 목소리는 쓸쓸한 기분이 들 정도로 상냥해서 어린 운율은 어떤 거리낌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검고 두꺼운 천이었다. 이런 것으로 정말 저것들이 사라지는 건지 조금 의심스러웠던 그는 일부러 앞을 보려 눈을 크게 떠보았다. 그러나 빛은 그 검은 장막을 결코 통과 하지 못했다. 비로소 그는 안심했다. 

  보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자 조모는 천을 좀 더 얇은 것으로 바꾸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천은 차츰 밝은 색으로, 얇고 부드러운 재질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얇고 얇은 베일 자락에서 투명한 유리알까지 이르렀다.

  투명한 유리알 속의 눈동자는 흡족하게 빛났다. 이미 그것은 눈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럽게 안경을 벗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이 기뻤다.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 조모를 찾았다.

  그리고 그녀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그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다. 

  ‘할머니는, 할머니는 어디에 있어?’

  어머니는 천천히 부드럽고 상냥하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불안함을 애써 숨긴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 율아. 할머니는 율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단다. 그러니까 율이는 할머니는 뵐 수 없어.’

  그 순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던 어둠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머니의 뒤편,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장식장 사이, 작은 발로 디디고 선 마루의 나무 틈새.

  그것들은 어디에서도 도사리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된단다.’

  다정하게 울리던 그 목소리마저 어둠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던가. 신음 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는다. 생각해보면 그는 조모의 손의 형태나 감촉은 기억해도 온기만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심장이 욱신 거린다.

  그는 미친 듯이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모친이 무엇인가 소리를 친 듯 했지만 그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 따윈 끊임 없이 소근 거리는 그것 들의 목소리에 파뭍혀 닿지 않았음으로.
 
  그는 손등을 피가 나올것 처럼 강하게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며 울고 소리지르며 미칠때까지 난동을 부리게 될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경기라도 잃으킬듯이 떨리는 몸을 가누지 못해 문에 등을 대고 기대어 있있던 그의 시선에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이 들어왔다. 얇은 검은색 태. 매끄러운 한쌍의 렌즈. 그는 떨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안경을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는 천천히 안경을 썼다.

  차가운 감촉이 눈가를 뒤덮었다.

  그리고 세상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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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Panasonic | DMC-FX180 | Normal program | Pattern | 1/100sec | F/2.8 | 0.00 EV | 6.0mm | ISO-1600 | Off Compulsory | 2009:03:22 20:02:00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1학년 3반 교실. 문 안쪽에서는 소란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점심시간, 오십 여분 가량의 자유 시간 동안 흐트러진 아이들에게 조용히 자습을 하면서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중 하나. 단 5분이라도 더 많이 까불고 떠들고 싶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역시 수업도 중요하다.

  운율은 예고 없이 교실의 문을 열었다. 아직 중학생 티를 벗지 못해 자그마한 소년소녀들이 화들짝 놀라서는 재빨리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책상에서 자세를 바로하면서도 아이들은 국어 시간인데 최명학이 아닌 운율이 들어오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운율은 아이 들을 둘러보며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국어 시간은 미술과 바꾸기로 했다. 최명학 선생님은 조금 바쁘셔서….”

  그의 설명이 이어지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최명학이 진행하는 국어수업은 조금의 쉴 틈도 없이 펜을 놀려야 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제법 버거워했다. 몇몇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는데, 손재주가 별로 없어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녀석들이었다.

  “자, 자 조용.”

  그다지 커다랗거나 무서운 목소리도 아니건만, 아이들은 얌전히 입을 다문다. 그의 목소리는 무개감 있고 침착해 듣는 이로 하여금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운율은 가져온 도화지 꺼내어 천천히 느긋한 동작으로 나누어 주며 설명했다.

  “갑작스럽게 수업이 바뀐 관계로 오늘은 연필, 또는 펜을 이용한 자유화를 하기로 했다. 주제는 봄. 연상되는 것을 그리면 되는데, 생각나는 게 없으면 정원의 꽃이라도 그리고.”

  꽃이라도 그리라는 말에 몇몇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커다란 꽃 하나만 대충 그리고 남는 시간동안은 수다라도 떨려는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들려온 말이 실망을 금치 못했다.

  “단, 정성을 들여 그리는 것 잊지 말도록. 내신에 방영할거니까.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도 좋다.”   

  종이가 빠짐 없이 아이들 손으로 넘어가자  교실은 곧 사각거리는 소리와 나지막이 소곤거리는 소리로만 가득해졌다. 운율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교사용 책상에 앉아 천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몇몇 여학생들이 그 모습을 훔쳐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을 그릴 때 그는 평소 학생들이 알고 있던 얼굴과도, 안경을 벗고 있을 때와도 다른 느낌이다. 잔뜩 몰입해 있는 그 얼굴은 함부로 말을 걸기 힘든 일면이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는 가운데, 교실 문이 예고 없이 열렸다. 운율은 고개를 들어 방문자를 확인했다. 최명학과 함께 소녀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운율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이들은 낯선 여학생이 들어서는 것을 보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최명학은 운율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들을 향하여 설명했다.

  “자, 조금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전학생이다. 앞으로 같은 반에서 생활할 것이니 사이좋게 지내도록.”

  그리고 여학생을 향하여 소개를 하라는 듯 손짓했다.

  “안녕하세요.”

  주눅 들거나 까부는 말투가 아닌 단정하고 투명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몇몇 남학생들은 ‘오오’ 하는 소리를 내며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소녀는 말을 이었다.

  “김나루 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듯한 자세가 마음에 든 듯 최명학은 나루를 향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말했다.

  “자, 그럼 일단 소개는 이쯤해서 끝내고, 나루는 저기 제일 뒤쪽 창가에 자리가 있으니 거기 앉으면 되겠구나. 혹시 시력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지?”

  “네. 오히려 좋은 편이예요.”

  “그래, 그럼 나는 이만 나가보마. 운선생님 그럼 실례 했습니다.”

  최명학이 운율의 이름을 부르자 나루가 살짝 그를 돌아보았다. 운율은 그녀을 흘깃 바라보고는 최명학을 배웅했다. 그리고 도화지 한 장을 꺼내어 나루에게 건네었다. 

 “자, 여기 받아가라.” 

 나루는 두 손으로 종이를 받아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술을 담당하고 있는 운율이라고 한단다. 지금은 미술수업 중이고. 봄을 주제로 자유화를 그리고 있으니까, 연필이나 볼펜으로 그리고 싶은걸 그리거라.”

  “네.”

  도화지와 운율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나루는 얌전히 대답하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나루를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던 남자아이들 중 하나가 이이를 제기했다.

  “선생님! 너무해요, 전학생이 왔는데 그냥 계속 수업하시기예요?”

  “그런 것은 담임인 최명학 선생님 시간에 건의하도록.”

  단칼에 자르는 말에 말을 꺼낸 남자아이는 울상을 지었고, 아이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소란도 잠시, 다시 교실은 정적과 사각거리는 소리만으로 가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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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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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념에 젖어있는 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던 소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얀 꽃잎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깊은 호수를 닮은 촉촉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녀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아니, 사실 그렇게 느린 속도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 그 모습에서는 일종의 엄숙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삼켜졌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운율은 어떠한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암(暗). 그순간 만물은 색을 덧칠해 진 듯, 짙고, 선명하고, 그러면서도 어두운 빛으로 감싸였다. 조금 전까지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맑은 빛이었던 풍경들은, 그 순간만큼은 유화의 그것처럼 무겁고 강한 질감을 띠고 있었다. 세상이 넓고 거대한 검은 천에 뒤덮인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단 한번 눈을 깜빡이 사이,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온화한 빛이며 가벼운 봄의 기운이 다시 교정에 맴돌았다.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는 운율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가볍고 아름답고 덧없는 하얀 꽃잎들이 그 뒤를 따라 교실 안으로 흩뿌려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교사로 향하고 있었다. 그 발치에는 이미 검은 민달팽이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운율은 조금 전 자신이 목격한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허나 그림자들이 갑자기 정화 되었다는 것 이외엔 무엇 하나 알아낼 수 없었다. 갑자기 들이키는 담배 연기가 지독하게 쓰게 느껴졌다.

  그때,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운 선생님, 운 선생님!”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제법 다급한 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운율은 손을 뻗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안경을 집어 썼다. 투명한 유리알이 눈동자를 덮자 그때까지 풍기던 서늘한 기운이 서서히 지워졌다. 대신 흐릿하고 평범한 존재감이 그 자리를 메웠다.

  창틀에 서 있던 여인의 모습 역시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커다란 녹색 눈을 가진 길고 아름다운 갈색 털의 노르웨이숲 고양이 한마리가 남아 있을 뿐. 고양이는 그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며 따스한 볕을 만끽하고 있었다.

  “운 선생님, 운율 선생님! 안에 없어요?!”

  문을 두드리는 이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운율은 부드럽게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최명학 선생님.”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섰다. 대답이 늦은 것에 조금 불쾌한 감이 있었으나,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 때문에 최명학은 금세 그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실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전학생 때문에 서류작업할 일이 좀 생겨서 그러는데 미술 수업과 시간을 바꾸었으면 합니다만….”

  김나루는 아마 최명학의 교실에 배정된 모양이다. 전학생이 오면 이것저것 설명을 하고 서류를 정리하는 작업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 그래서 그는 담당인 국어 수업을 진행하기 어려워져 운율은 찾아온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 내려가 보지요.”

  승낙의 말에 최명학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그것도 급하게 전학생이 와버려서…. 응? 운 선생님. 저기 저 고양이는 뭡니까?”

  마음의 여유를 찾은 최명학의 눈에 뒹굴 거리는 커다란 고양이가 들어온 모양이다.

  운율은 소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이 근처에 돌아다니는 녀석인데, 창가에 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와서는 내려가지 못하고 있더군요. 하하.”
  “호오, 그렇군요. 저, 그럼 수업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바빠서 이만.”

  최명학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 거의 뛰다시피 문을 나섰고, 운율은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늘어져 있는 책상 위에서 몇 가지 물건을 챙겨들고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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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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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네 살.


  “엄마, 저기 이상한 아저씨가 있어.”

  뜰에서 놀다 평소처럼 가벼운 기분으로 조잘거린 한마디에 엄마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그래? 엄마 눈에는 안 보이는데?”

  가볍고 무게 없는 대답은 그가 기대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몇 번인가 어머니에게 ‘그것’에 대하여 말한 적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흘려들을 뿐, 결코 분명히 대답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단 한번도.

  가끔 그들과 시선이 마주칠 때가 있다. 물론, 그것들 모두에게 ‘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숨을 죽이고 조용히 주시하는 기척이 전해져 온다. 검고 서늘한 의식은 언제나 서서히 다가와 주위를 맴돈다. 그리고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서서히 체온을 빨아들인다. 사로잡힌 손과 발은 조금씩 무거워지며, 이윽고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진다. 냉기는 밖에서부터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안쪽에서부터 스멀대며 퍼져 나가는 소름끼치는 느낌이 전신을 엄습한다.

  그럴 때면 그는 온 힘을 기울여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마치 주문을 외우듯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며. 어떤 근거도 없음에도. 단지 그렇게 믿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어째서? 사람들은 저런 이상한 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버리는 걸까.

  그런 의문은 어린 가슴에서 조금씩 뿌리를 내려 깊이깊이 파고들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뿌리는 너무나 깊어져 더 이상 그 안에만 담아 두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그래서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고 있으면서도 상냥한 빛을 띤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저기, 엄마. 엄마는 저 사람, 안 보여? 저기 저 얼굴이 없는 빨간 옷을 입은 아저씨 말이야.”
  라고 말해 버리고야 만 것이다. 그러나,
  “어, 어머, 얘는, 또 이상한 소리를….”

  모친의 시선에 상냥함 대신에 공포라는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자신이 해선 안 되는 말을 한 것이라는 깨달았다.

  “그만 하렴. 이웃집에서 들으면 정말로 혼날 게 분명해요, 율아.”

  또한, 그녀는 그가 보는 것을 결코 받아들려 하지 않으리란 것을,

  “이 아이는 어째서 자꾸 기분 나쁜 말을 하는 걸까….”

  스치듯 흘려 말한 그 잔인한 말이 언제까지나 가슴에 새겨지게 될 것을 알았다면, 그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설혹 영원히 홀로 그 두려움과 싸우게 되었을지라도.

  이웃집의 아저씨가 교통사고로 죽은 지 일 년이 넘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 장을 보러 나왔다가 동네 아줌마들이 수근 거리는 소리를 들은 뒤였다. 

  사고 현장은 끔찍했다고 한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한 승용차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있었고, 그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에 물들어 옷은 붉은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그는 자신이 보고 있던 ‘그것’들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이형(異形)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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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셔츠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어 입에 물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멀어져 가자 여인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아름다운 녹색의 눈동자 속에 자리한 동공은 세로로 길다.

  여인은 잠시 동안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훔쳐보며 코를 킁킁 거리다 독한 담배 냄새가 흘러들자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어버린다.

  약간 거친 입술 사이로 가느다랗게 담배 연기가 흘러나와 바람결에 흩어졌다.

  “귀찮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소녀, 김나루는 아직도 건물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엇을 보는 것일까. 시선은 학교 어딘가로 뻗어 있었다.

  다시 강한 바람이 불었다. 남색 체크무늬 치맛자락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바람결에 춤추는 벚꽃 잎 사이로 사라질 것 같다.

  그때 벚나무의 검은 나무둥치에서 무엇인가 어둡고 형체 없는 것이 스멀대며 솟아오르는 것이 시선에 들어왔다. 하나, 둘. 검은 안개 덩어리는 여기저기서 솟아올라 마치 민달팽이처럼 꿈틀거리며 소녀를 향하여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미처 함께하지 못한 덩어리들이 툭툭 떨어져 움찔거리다 흙속으로 녹아든다.

  운율은 혓소리를 냈다.

  “쳇, 벌써 시작인가. 저 아이, 과연 귀찮은 체질이군.”

  검은 민달팽이 형상의 안개. 그것은 겨울의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생물의 흔적이었다.
  이 학교는 분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샐러드 볼처럼 움푹한 땅. 받아는 들이는 것도 까다롭지만 내놓는 것도 가벼이 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공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안에서 이루어 졌던 일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일부를 남겨두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계절은 봄. 만물이 술렁이는 시간. 이 시기에 마치 아지랑이처럼 저런 것들이 어디선가 솟아올라 배회하곤 한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저것들은 딱히 쓰인다 해도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는 것들이다. 그저 침입하기 쉬운 존재에게 달라붙어 그 기운을 훔치기 위해 노력하다가 소득 없이 바스러져 사라질 뿐.
 허나 지금은 분명히 평소보다 양이 많다. 분명히 저 소녀의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 저 정도 개체수면 무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작은 부스러기라 해도 그것들이 뭉치고 섞이다 보면 그 사이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이 눈을 뜨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법 성가신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기분 나쁜 것들.”

  내뱉듯 말하는 그의 눈가가 찌푸려진다. 경멸조차 어린 시선으로 그는 검은 민달팽이들이 소녀를 향하여 기어가는 것을 주시했다. 끈적끈적해 보이는 덩어리들이 이제는 거의 발치에까지 도달한 순간,

  “나비.”

  그가 호명했다.

  무릎에 기대어 있던 여인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암녹색 홍채가 더욱 가늘어지면서 부드럽게 미소를 짓듯이 입가가 흐트러진다. 여인은 우아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유연한 동작으로 창틀에 올라섰다. 작은 꽃무늬가 있는 연노랑 쉬폰 원피스가 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긋나긋한 몸놀림은 나태해 보이기까지 했으나 그 안에는 감출 수 없는 힘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사냥하기 직전인 맹수의 그것처럼.

  입술 양 끝이 들어 올려 지며 그 사이로 날카롭고 뾰족한 이빨들이 드러난다. 아름답지만 흉폭한 미소다. 검은 민달팽이들을 바라보는 기형(奇形)의 눈에 서서히 녹(綠)광이 어리기 시작한다.

  그때, 교정을 주시하던 소녀의 시선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조금 전 까지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검은 덩어리들을 발견이라도 한 듯.

  그리고 동시에 민달팽이들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정적.

  마치 시선을 마하고 말없는 대화라도 나누는 듯이 고요함이  솟아올랐다. 욕망에 가득 찬 떨림도, 생을 향한 갈망도 사라진 듯.

  그 기현상에 운율은 자신도 모르게 여인을 제지했다.

  “잠깐, 기다려.”

  금방이라도 뛰어 내릴 듯 몸을 굽히던 여인이 멈춰서 그를 돌아보았다.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는 시선도주지 않고 운율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느낌이었다. 기시감? 아니 틀리다. 어느새 그는 소녀에게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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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asonic | DMC-FX180 | Normal program | Pattern | 1/25sec | F/2.8 | 0.00 EV | 6.0mm | ISO-400 | Off Compulsory | 2009:03:21 11:04:22


‘이번에 전학생이 올 예정이다.’

  며칠 전, 갑작스레 수업중인 운율은 불러낸 이사장이 던진 첫 마디이다.

  그렇게 말하며 책상 위로 내밀어진 것은 전학생의 대한 신상명세가 적혀있는 파일.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내용을 대충 훑어보던 그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 : 김나루

성별 : 여

나이 : 만 16세.

신장 : 158cm

성적 : 양호

‘생후 1개월 안쪽에 서울 강남의 어느 골목에 유기됨. 그 후 근처에 거주 중인 한 부부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며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둘째로 입적됨.

차츰 성장하며 주위에서 상식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괴현상이 출몰. 처음에는 부부 역시 아이를 감싸고 이해하려 했으나 차츰 그 정도가 더해감에 따라 기피하기 시작.’

  그 뒤로는 괴현상과 관련된 자료집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가 내용물을 읽는 동안 이사장이 설명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그 아이의 오빠가 집안에서 여러모로 보호자 노릇을 해줬던 것 같지만, 분가를 하게 되면서 더 이상 집에 있기 힘들어진 모양이다.’

  읽고 있던 프로파일을 책상위로 털썩 소리 나게 떨어트리며 운율이 말했다.

  ‘여기가 아니라도 기숙제 학교는 많을 텐데? 왜 이런 말썽을 일으킬 것 같은 아이를 받아 들인 거지?’

  날이 선 목소리이나 이사장은 신경 쓰이지 않는지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물론 다른 곳에도 기숙사가 있는 학교는 있다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이 아이가 그런 곳에 간다면? 어떻게 될지는 너도 잘 알고 있잖느냐.’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이사장은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날카로운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낙하산이라는 구설수에 오르면서까지 너를 이 학교 미술교사로 받은 건 다 이런 일을 맡기기 위해서였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낙하산 이야기는 운율의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더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자 그는 이사장을 향해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영감이라는 말에 이사장이 발끈하고야 말았다.

‘뭐, 뭐야? 영감?! 난 아직 앞날이 창창하다고! 네놈이야말로 빌어먹고 싶지 않으면 군말 말라고! 능력이 있으면 써먹어야 하는 법이야!’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그는 결국 다시 한 번 프로파일을 펼쳐보았다.

 

*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 깔끔한 검은 단발머리.

벚꽃 아래 서 있는 소녀의 얼굴은 파일에 첨부되어 있던 사진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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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우리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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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고 청명한 바람이 불어온다. 짙은 고동색 나뭇가지가 바람을 따라 흔들리며 꽃잎을 흩뿌렸다. 하양, 연분홍빛 꽃잎들 사이로 벌들이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웅거리며 떨리는 수천의 날갯짓은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취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소리에는 어딘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힘이 어려 있다.

  그는 언제나처럼 2층 미술실의 창가에 나른히 앉아 교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식물을 좋아하는 이사장의 취향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교정은 여러 종의 나무와 화초들이 정성껏 가꾸어져 있었다. 벚꽃만이 아니다. 복숭아꽃과 살구꽃, 이화, 매화…. 대부분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라는 것이 이사장답다면 이사장답다랄까.

  운치를 즐길 줄 아는 학생들이 그 아래 앉아 도시락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몇몇은 이를 배경으로 장난스러운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가롭고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는 남자의 앞머리 위로도 따스한 햇볕이 내리쬔다. 검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에서 빛이 반짝이며 흩어지는 모습이 덧없으면서도 따스해 보였다.

  그러나 그 아래 자리한 눈은 베일 듯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다. 만약, 그 앞의 펼쳐진 광경이 고요히 쌓여 있는 눈의 들판이었다면 조금쯤 괴리감이 줄어들었을까.

  그의 무릎에는 한 여인이 머리를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광경이었다. 이제 신학기가 시작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교의 교실에서 마치 밀회라도 즐기는 듯, 여인은 달콤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의 옆에 앉아 가만히 부드러운 갈색의 머리카락을 부벼대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곱슬거리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눈에서는 정념이라든가 욕망 따위의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천천히 습관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부드럽게, 계속해서.

  기분이 좋은 듯 여인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 무릎에 더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왔다.

  멀리서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린다. 아직 교정에 남아 꽃을 즐기던 몇몇 학생들이 서둘러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듯 그렇게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순간, 바람이 거칠게 불더니 한 무더기의 꽃잎들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그는 무의식중에 시선으로 그 나비처럼 흔들리는 작고 하얀 조각들을 쫓았다. 연약한 꽃잎은 그저 바람이 이끄는 대로 날갯짓 하다 이윽고 학교의 정문 앞에서 흩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어깨 조금 위에서 잘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지고 있었다. 교복은 단정했고, 손에는 고동색의 조금 낡아 보이는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다. 유달리 피부가 희어 보이는 것은 벚꽃 사이로 스며드는 하얀 빛 무리 때문일까.

  등교 시간이라기엔 지나치게 늦었으나 소녀에게서는 지각생 특유의 초조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단지, 마치 그러기 위해 서있는 것처럼 하얗게 물든 교정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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