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해구아래/蝕:eclipse (12) 썸네일형 리스트형 김하루 나루의 오빠 하루. 의대생. 나루보다 세살 연상.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11 운율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본관을 벗어나 별관으로 향하는 짤막한 오솔길로 들어섰다. 요철진 바닥엔 떨어진 하얀 꽃잎이 비 온 뒤 물이 그러하듯 고여 있다. 하얗고 보드라운 길 위를 약간은 시린 바람과 매끄러운 꽃잎을 맞으며 나아가는 동안 나루는 조금씩 걸음이 늦춰지곤 했다. "김나루?" 그럴 때마다 운율은 몽롱하게 서 있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러면 그녀는 마치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이 정신을 차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별관이라 불리는 그 건물은 이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복도와 계단은 아직도 나무로 짜여 있었다. 미술실은 발을 디딜 때마다 살짝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이 층 복도 초입의 왼편에 있었다. 운율이 익숙한 동작으로 문을 밀자, 열어두고 나왔던 창문을 통해 .. 10 종이 울리기 무섭게 복도는 재잘거리는 아이들로 가득 찼다. 운율은 어수선한 공기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이사장실은 두 층 위, 본관의 제일 으슥하고 구석진 자리에 있었다. 대부분의 교직원들은 가기 꺼려하는 곳이다. 그의 아지트는 몇몇 수상해 보이는 물건들과 일부 악취미적인 책들, 그리고 서류더미로 들어차 있다. 진검인지 모형인지 모를 벽에 장식된 낡은 칼은 둘째치더라도 기묘한 모양의 탈에서 억지로 시선을 돌려 책꽃이에 관심을 쏟던 방문객은 알 수 없는 검붉은 얼룩진 가죽 책들을 발견하곤 도망치듯 그 방을 빠져나가곤 했다. 그런 그의 사무실에서도 그나마 소박하고 편안한 -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정상적이라 할 수있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이사장실의 문에 걸려있는 open/close 문패였다.. 9 푸드득. 꾀꼬리는 아슬아슬한 순간 날아올라 날카로운 손아귀에서 하늘로 도망쳤다. 그러나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깃 몇 개가 뜯겨져 흩날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깊고 푸른빛 사이로 연분홍 꽃잎과 선명한 노랑 빛 깃털이 흔들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노획물 대신 허공을 휘저은 나비는 매끄럽게 몸을 비틀어 땅위로 내려섰다. 그리고 무심 한 듯, 새가 날아간 하늘은 돌아도 안보고 머리카락과 구겨진 치맛자락을 정리한다. 하지만 몸짓에 담긴 신경질 적인 기운마저 지우지는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던 운율은 무심결에 하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여전히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흰 뺨을 부드럽게 이완되어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 8 사각, 사각. 상념에 젖어있던 그는 문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시계 바늘은 제법 많이 움직여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고 미간을 문질렀다. 도수 있는 렌즈가 아니지만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투명한 렌즈 너머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어린 시절, 안경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그것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서였지만, 좀 더 자라서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안경을 쓰는 것은 볼 필요가 없는 것까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일단 시선에 들어오면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 주의를 끄는 강한 힘이 있다. 그는 성가신 일에 얽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나루가 있는 방향을 항해 시선을 보냈다. 소녀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을 .. 7 운율은 다시 교사용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빛이 나른히 하얀 도화지위로 쏟아진다. 얇은 유리창을 두드리는 바람은 아직 서늘한 감이 남아있지만, 교실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한다. 금싸라기 같은 볕만이 창가를 따스하게 데울뿐. 운율은 무의식중에 안경을 쓰다듬었다. 한기를 막아주는 창문의 모습과 그의 ‘볼 수 있는’ 눈을 봉(封)하는 안경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비슷했다. 돌이켜 보니 안경을 쓰기 시작한지 벌써 20여년이나 흘렀다. 뇌리에 다정한 한마디가 떠올랐다.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된단다.’ 그것은 오래전 세상을 뜬 조모가 그에게 해주었던 말. 어린 시절 보아서는 안 될 것이 보는 것으로 인해 고통 받던 때. 그의 부모는 이형(異形)을 보았노라는 아들의 고백을 단.. 6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1학년 3반 교실. 문 안쪽에서는 소란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점심시간, 오십 여분 가량의 자유 시간 동안 흐트러진 아이들에게 조용히 자습을 하면서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중 하나. 단 5분이라도 더 많이 까불고 떠들고 싶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역시 수업도 중요하다. 운율은 예고 없이 교실의 문을 열었다. 아직 중학생 티를 벗지 못해 자그마한 소년소녀들이 화들짝 놀라서는 재빨리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책상에서 자세를 바로하면서도 아이들은 국어 시간인데 최명학이 아닌 운율이 들어오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운율은 아이 들을 둘러보며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 5 상념에 젖어있는 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던 소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얀 꽃잎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깊은 호수를 닮은 촉촉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녀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아니, 사실 그렇게 느린 속도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 그 모습에서는 일종의 엄숙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삼켜졌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운율은 어떠한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암(暗). 그순간 만물은 색을 덧칠해 진 듯, 짙고, 선명하고, 그러면서도 어두운 빛으로 감싸였다. 조금 전까지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맑은 빛이었던 풍경들은, 그 순간만큼은 유화의 그것처럼 무겁고 강한 질감을 띠고 있었다. 세상이 넓고 거대한 검은 천에 뒤덮인 것 같았다. 그리고, 모..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