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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르고 건조하니까 그곳으로 흘러가는거야. 천천히 조금씩 넘치지 않게 갈라진 흙 사이로 온전히 스며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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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단편'에 해당되는 글 15

  1. 2015.02.16 네가 그리는 궤적
  2. 2012.10.10 다시 잠드는 방법(2)
  3. 2012.03.05 과수원 기담
  4. 2012.02.10 치질 때문에 죽어서 영혼이 떠나려는 사람.
  5. 2011.12.21 안녕(2)
  6. 2011.11.20 그녀의 감기 대처법(2)
  7. 2011.11.08 반지(2)
  8. 2010.11.03 고양씨와 늑대씨(4)
  9. 2010.02.06 나의 사랑스러운
  10. 2010.01.18 빨리 잠드는 방법(4)
  11. 2008.12.08 戀心
  12. 2008.12.05 그 곳
  13. 2008.10.11 인사
  14. 2008.09.07 잔인한 세상이여 안녕.
  15. 2008.03.08 리히텐 스타인의 그림
2015.02.16 23:14 깊은해구아래/단편


1.

  그것은 우주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 흔한 천체에 불과했다. 태양에게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어 한줌 빛도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공허히 존재하며, 설혹 빛이 흘러든다 해도 온전히 빛을 내지도 못하는 검은 얼음 덩어리. 태양계에 존재하는 천체들 중에서 가장 검은 존재. 그것이 바로 너였다. 그러나 너는 수많은 암석과 얼음덩어리들의 틈바구니에서 튕겨져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너의 운명은 역전한다.

  이유? 목성이나 해왕성의 중력, 혹은 또 다른 천체의 충돌. 따져보면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 앞에 펼쳐진 길이다. 너는 다른 천체들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길을 걷게 되는 거니까.

  태양계의 중심부로 끌려들어간 너는 광원에 점점 가까워진다. 카이퍼 벨트에 방치 되어 있던 시절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양의 빛의 산란(散亂). 네 몸뚱이는 태양과 가까워질수록 표면이 달궈진다. 이윽고 임계점에 달하면, 네 몸을 구성하고 있던 물질들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격열하고 강하게. 너의 몸은 안쪽에서부터 기화해 타오른다. 심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체들은 태양 빛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긴 꼬리를 만든다.

  특정 궤도로 오는 순간 너의 미래는 불확정에서 확정으로 고정된다. 수천, 혹은 수만 번, 너는 태양의 주위를 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태양에 가까워질 때마다, 그 열기와 빛에 타오를 것이다. 서서히 너를 구성하고 있는 수분과 먼지, 가연성 물질들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수증기를 뿜어낼 수 없어지는 순간 너는 혜성에서 단순한 암석 덩어리가 되어버린릴 것이다. 길고 아름다운 꼬리가 사라진 뒤에도 너는 같은 궤도를 돌며 같은 열기와 같은 빛에 노출 될 것이다. 처음 태양계의 품안으로 던져진 순간과 같은 우연이 다가오기 전까지. 아마도 영원히.



2.

  너 파란 양을 찾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알아? 어, 그래. 양, 파란색의 양 말이야. 옛날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색색의 병아리처럼 물감으로 염색한 가짜 파란 양, 혹은 어린 왕자의 상자 속에 들어있던 상상속의 양이 아닌, 진짜 살아있는 양을 말이야. 

  그래, 그 스스로도 자기가 얼마나 허황된 꿈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어.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할리 없다는 것 역시.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는  도무지 그것을 포기 할 수 없었지. 그 어리석은 집착만 뺀다면 그는 나름 완벽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멈출 수 없었지. 계속 되는 파란양을 향한 집착은 그를 좌절시켰어. 그는 스스로를 비참한 아주 작은 생물 – 마치 개미나 하루살이처럼 여기게 되었어. 아니 실제로 그는 비참했고 무력했어. 그에게는 파란 양이 없었으니까.

  결국 어느날, 그는 가진 것 모두를 내팽겨 치고 길을 떠났어. 길고 긴 여행이었지. 산을 넘고 물을 건넜어. 동화 속에서 나왔을 법한 수많은 위험과 모험들 끝에, 그는 한 신전에 도착했지.

  사제가 그를 맞아주었어.

  [아주 먼 길을 왔군요. 순례자여, 당신은 무엇을 찾아왔습니까?]

  그가 답했지.

  [이 안에는 진실의 샘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보여주는 샘이.]

  [네 그렇지요 이안에는 과연 그런 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순례자여.]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

  [나는 파란 양을 찾고 있어요.]

  사제는 그를 비웃거나 허황된 이야기를 말한다고 하진 않았어. 그러나 매우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

  [순례자여 진정 이 선택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크나큰 슬픔에 잠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어. 사제는 말없이 길을 내어주었고 그는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섰지.

  샘이 거기 있었지. 어둠속에 스스로 희미한 푸른빛을 내 뿜으며 그를 유혹하고 있었지. 동굴은 그 샘의 빛으로 밝혀져 있었어.

  그는 샘 앞으로 다가가 깊이 눌러쓰고 있던 두건을 벗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어. 그의 머릿속엔 그 순간에도 파란양, 오직 파란양 뿐이었어. 

  샘은 잠시 흔들리더니, 마치 평범한 샘이 그러하듯 그의 모습을 비춰줬어. 

  거기에 파란 양이 있었어. 

  그래 맞아, 그가 바로 파란 양이었던거야.

  그는 샘을 바라보면 소리 없이 울었어. 

  거기엔 파란 양이 있었어. 그래. 하지만 그건 그가 찾고 있던 파란 양이 아니었어. 그는 자신이 아닌 또 다른 파란 양을 찾고 싶었던 거야.

  슬프고 지친 얼굴로 동굴을 나온 그에게 사제가 물었어.

  [원하는 것을 찾았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어. 그리고 다시 슬프고 무거운 걸음을 내딛었지.



3.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너는 또 잔을 기울였다. 미처 내뱉지 못한 자잘한 뉘앙스들이 너의 입안으로 삼켜지는 모습을 나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가볍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리.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토록 무방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너이지만, 사로잡으려 하는 순간 네가 뿜어내는 열기에 나는 흔적도 없이 불타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 시선 안에 담기는 풍경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비록 영원히 네가 나의 것이 되지 않을지라도. 나는 너의 손짓 하나, 눈의 흔들림, 쏟아져 나오는 한숨 하나까지 모두 시야에 담는다. 

  너의 이야기 속에 흘러나오는 주인공이 되는 일이 없더라도 적어도 나는 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너의 반짝임과, 네가 그리는 궤적 하나 하나를 기억 하는 역할만은 누구에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너는 말없이 일어선다. 긴 인사의 말은 없다. 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선다. 창밖으로 푸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4. 
 
  운이 좋았다. 오늘 밤 하늘은 푸른빛이 서릴 정도로 시리고 맑았다. 달빛마저 없는 밤하늘에는 크고 작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천체관측을 하기엔 최적의 날씨였다. 나는 손쉽게 표적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뷰파인더에 흐릿한 상이 잡힌다. 익숙하지만 신중한 손놀림으로 배율을 고정하자 청녹색의 긴 빗자루 모양의 별이 뚜렷해진다. 혜성은 지구를 지나 점점 멀어지고 있는 중이지만, 태양과의 거리는 가까워 가장 밝게 빛나는 날이었다. 머지않아 너는 첨차 차갑게 식어 만원경으로도 보이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네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비록 찰나일지라도. 필시 너는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너의 궤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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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우리알레
2012.10.10 23:25 깊은해구아래/단편



  차다. 차갑다. 겨우 잠들었나 했는데. 갑작스러운 불쾌한 습기에 소녀는 눈을 뜬다. 


  베갯맡이 축축하다. 처음엔 평소 습관처럼 침을 흘린 걸까 하는 생각이 짤막하게 머릿속을 스쳤으나, 젖은 부위가 지나치게 컸다. 생각이 깊어지는 동안 서서히 의식이 각성상태에 접어든다. 동시에 툭, 툭, 툭 하고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기 어린 울림이 귀에 들어온다.


  소리의 근원은 바로 머리 위. 그제야 베게 끄트머리로 무엇인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둔한 진동이 뺨으로 전해졌다. 


  또 비라도 새는 걸까. 집주인에게 항의해야겠는걸. 


  귀찮은 마음에 옆으로 누운 상태 그대로 고개는 움직이지도 않고 한쪽 손을 머리 위로 뻗는다. 빠르지 않게 느릿느릿.


  곧 소리의 근원에 도달한 손 위로 액체 방울이 떨어졌다.


  톡, 톡, 톡.


  차지 않았다. 오히려 체온에 가까워 살짝 뜨거울 정도. 액체는 물과는 달리 묘한 점성이 있어 느리게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천장에 구멍이 나서 빗물이 누수 되는 것이 아님은 증명되었다.


  하긴, 창밖은 고요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 빛나는 만월의 빛이 창가에 선명하다. 불 켜는 것도 귀찮았던 소녀는 달빛에 의지해 조용히 정체불명의 액체가 떨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는 쪽의 천정을 탐색한다. 


  처음, 그녀가 보인 반응은 입을 떡하고 벌리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을 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그것이긴 했지만, 그녀 경우는 조금 달랐다. 물론, 놀라긴 무척 놀랐다. 하지만 그것 보다는 그것의 '표정'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를 모방한 것에 가까웠다.


  그것은 머리 바로 위 천정에 달라붙어 있었다. 팔도 다리도 없는 주제에, 접착제로 붙여놓기라도 했을까. 아주 안정감 있는 느낌으로 천장에 들러붙은 거대한 얼굴이 입을 한껏 벌리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의 얼굴과는 달리(이미 크기부터가 정상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마치 가면처럼 넓적하고 평평한 얼굴. 눈도 코도 전체적 비율보다 기형적으로 조그마한 가운데, 거대한 입이 얼굴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다. 흰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치아와 검붉은 혀 안쪽으로는 끝을 알 수 없는 길고 미끈미끈한 동굴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껏 벌어진 입에서는 여전히 똑, 똑, 똑 규칙적으로 침방울이 낙하한다. 


  넋을 놓고 입을 벌린 몰골로 그것을 바라보기를 약 오 분가량. 제정신을 차린 뒤에는 턱이 얼얼한 지경이었다. 사실 소녀가 정신을 차린 것도 그 얼얼한 턱 때문이었다. 한껏 벌어져 있었던 탓에 욱신거림은 쉬 가시지 않았다.


  턱을 문지르며 그 기괴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 녀석은 턱이 안 아프냐는 소소한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는 와중에도 침은 계속 떨어져, 베갯맡은 이젠 축축하고 비릿하고 끈적거림으로 가득했다. 


  아아, 정말 너무하네!


  소녀는 짜증을 내며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입을 쩌억 벌리고 침을 투하한다. 


  뭐가 목적이야!


  투덜거리며 소녀가 녀석의 얼굴을 살펴본다. 얼굴은 소녀가 일어나거나 말거나 움찔하지도 않는다. 대신 시선은 한쪽 구석에 고정된 채. 그 끝을 따라가자 스피커 옆에 놓인 쿠키 바구니가 보였다.


  서, 설마 쿠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녀석의 입에서 침 분비량이 늘어난다. 


  맙소사, 너무하잖아! 


  소녀는 넌덜머리를 내며 침대를 빠져나온다. 그리고 바구니를 집어 든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녀석의 시선 역시 바구니를 따라 움직인다.


  침대 위로 올라가 손을 뻗어봤다. 하지만 소녀의 키는 한참 모자랐다. 결국, 조금 실례이긴 하지만 좀 더 재미있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얏!


  짤막한 기합과 함께 던진 쿠키는 거대한 입안으로 올바르게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다물어질 줄 모르던 턱이 번개처럼 끌어당겨 졌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꿈틀거린다.


  소녀는 벌리고 있을 때는 기묘할 정도로 커다랗던 입이었지만, 그렇게 오물오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조금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을 움찔거리던 입은 잠시 후에 다시 쩌억! 하고 벌어졌다. 그리고 다시 똑, 똑, 똑 침을 흘린다. 다시 한 조각 던져넣자, 역시 번개처럼 닫히는 입. 맛을 음미하는 듯 한참 우물거리던 입이 벌어지자, 소녀는 또 한 조각을 던진다. 그리고 또 한 조각, 또 한 조각.


  뭔가 새 모이라도 주는 기분인걸? 하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쯤, 바구니는 완전히 비어 버렸다. 그러나 녀석은 여전히 만족을 못하는지 입을 한껏 벌리고 다시 침을 똑, 똑, 똑 떨어트린다. 


  이 상태로라면 끝도 없겠다며 한숨을 쉬는 찰나, 머릿속에서 가벼운 번뜩임이 스쳐 지나갔다.


  소녀는 옷장으로 다가가 어제저녁 들고 나갔던 가방을 집어 든다. 그리고 제멋대로 들어차 있는 물건들 속을 헤집었다. 분명 마지막 하나가 남아있었을 터였다. 과연, 손끝에 작은 종이 케이스가 집혔다. 가방은 다시 옷장 한쪽에 던져 넣고 케이스 안에서 풍선검을 꺼내 들었다. 녀석의 작은 눈이 기대에 빛나는 것 같았다. 포장지를 벗겨 내고 소녀는 신중하게 풍선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가볍게 던진다. 


  텁. 


  녀석의 표정에 드디어 만족감이랄 만한 것이 떠오른다. 우물, 우물 입술이 몇 차례 움직이더니 익숙하게 자그마한 풍선을 만들어내다. 그리고 풍선이 쪼그라들자 다시 빨아들여 입을 움직인다. 


  졸음 가득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녀는 축축해진 자리를 피해 베개도 없이 웅크린다. 


  그리고 다시 -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글쟁이들의 글 이야기]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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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우리알레
2012.03.05 11:34 깊은해구아래/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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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기담을 모으고 있다고? 이런 날씨에는 그런 오싹하고 기이한 이야기가 제격이긴 하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단 하나 뿐이야. 그다지 유쾌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지. 그래도 들을 텐가? 좋아. 정 듣고 싶다면 내 이야기 해 줄 수밖에.

 

-

 

  때는 9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절이었지. 줄지어선 나무그늘 너머에서는 뜨거운 햇살이 일렁이며 도로를 달구고 있었다네.
  거기에 한 소년이 있었어. 소년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었지. 지겨웠거든. 부모님과 함께 시골로 주말여행을 가는 중이었어. 고르지 못한 노면 탓에 차는 연신 덜컹거렸지.


  소년의 부모님은 그동안 줄곧 로망이었다며 갑작스레 시골의 작은 임대 별장으로의 주말여행을 계획했던거야. 소년의 아버지는 최근 보는 전원 잡지에서 주말이나 휴가철에 이용하는 작은 코타지에 대한 페이지를 펼쳐 놓곤 한참을 바라보곤 했었지.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친구들이 등산을 다녀와서 산에서 나물이며 도토리 때로는 희귀한 야생화를 가져왔었다는 일화들을 풀어 놓으며 적극적으로 임했고.


  이 여행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오직 소년 혼자뿐이었어. 사실 그날은 소년이 속한 무리의 친구들과 게임을 하기로 했었거든. 적대 무리와의 매우 중요한 항쟁이 있을 예정이었어. 화려한 빛과 마법, 전사들의 외침과 붉게 튀는 피를 생각 하자 전율이 일었지. 하지만 현실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를 시골구석의 낡은 오두막으로 향하고 있는 상황. 한숨만 나올 뿐이었지.


  "창문 닫아라. 에어콘 바람 다 새어나가지 않니."


  어머니의 잔소리에 소년은 입술을 삐죽이며 창문을 닫았다네.
  그 모습을 백미러로 흘깃 본 아버지가 말했어.


  "하하하, 이렇게 시골에 오니까 좋지?"


  소년은 이미 주머니에서 꺼낸 스마트 폰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여행에 흥분한 아버지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지. 그는 자신의 어릴 적 무용담을 섞어가며 야생에 대한 예찬을 한참 동안 늘어놓았다네.
  얼마간 더 달렸을까. 차가 멈춰선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네.


  "역시 자연의 공기는 좋구만!"


  아버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호탕하게 소리치며 심호흡을 했고,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조용히 차에서 내려 오두막을 살펴보았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낡은 나무 오두막이었어. 한동안 방치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듯이 군데군데 거미줄이 처져있었지.


  "좀 낡았네요."
  "이런 게 진짜 멋이지."


  어머니의 한숨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아버지는 껄껄 거리며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네. 여덟 평 정도의 작은 실내는 역시나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어.


  "청소부터 해야겠어요."


  귀찮아 질 것을 예상한 소년은 이쯤해서 빠지기로 했지. 말없이 돌아서 오두막을 나가는 그의 등 뒤로 어머니가 말했어.


  "얘, 어디 가니."
  "주변 좀 둘러보게요."
  "위험하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향해 말했어.


  "걱정 말라고. 사내자식이면 좀 거칠게 키워야지. 맨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는 것 보다…."


  오두막 뒤쪽으로는 야트막한 언덕 같은 산이 있었다네. 소년은 무작정 그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이. 평소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왔기 때문에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숲을 걷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어. 헐렁한 슬리퍼에 맨살이 드러난 팔 다리는 거친 풀과 나뭇가지에 걸리고 미끄러지고 긁히기 일쑤였으니까. 소년은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어.


  작은 모험심과 귀찮은 일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탐험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 서려는 찰나, 어디선가 달콤한 향이 나는 것이 느껴졌어. 꽃향기, 꿀, 베리류의 냄새. 그런 복잡한 향의 뉘앙스를 판별할 능력은 소년에게는 없었지만 돌아서려는 발을 묶어놓기에 충분했지.


  그곳 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네. 단지 넋을 잃고 향기를 따라 걷다보니 눈앞에 그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거야.


  작고 아름다운 과수원이었어. 100평 정도 되는 땅에는 울타리 모양으로 잘 가꾸어진 포도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지. 벌레 먹거나 시든 곳 하나 없는 푸른 잎과 줄기 사이로 매달린 포도 봉투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희었고. 봉투 하나하나 마다 묵직하게 알이 들어차 터질듯 부풀어 오른 모습이 탐스러웠어.


  거리가 가까워지자 향은 더욱더 농밀해졌다네. 달큰한 향에 취해 과수원 안으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갔지. 새하얀 봉투들은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듯 보였어. 입 안에 침이 고였지. 그래, 그것을 향해 손을 뻗을 때는 망설임이라고는 한조각도 없었다네.


  그런데,


  "이놈!"


  하는 살기 어린 외침이 귀를 때렸던 거야. 흠칫 놀라 돌아보자 뼈대에 가죽만 씌워 둔 것처럼 마른 노인이 낫을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지.


  "고오얀노옴!"


  더럽고 여기저기 헤어진 옷을 입고 낫을 휘두르는 노인은 아무리 좋게 봐도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네. 뿐만 아니라 노인의 오른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빈 검은 구멍이 자리하고 있었어.


  덜컥 겁이 났지. 발은 거의 본능 적으로 움직였어. 등 뒤에서 노인이 무엇인가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소리치는 것이 들렸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네.


  오두막에 도착 했을 때 꼴은 말이 아니었어. 슬리퍼 한 짝은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고, 팔다리는 긁힌 자국 투성이였지.


  "어머! 우리아들! 무슨 일이야?"


  낡은 펌프식 우물가에서 상추를 씻던 어머니가 놀라 한달음에 달려오며 말했지.


  "아니 신발은 어쩌고…."


  한숨을 내쉬며 발을 살피셨어. 그제야 발바닥에서 신경에 거슬리는 따끔따끔 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네. 잘 살펴보니 여기저기 가시가 배겨있었어.


  "조심 좀 하지."


  속이 상했는지 안색이 영 좋지 않았지.


  옆에서 펌프질을 하며 물을 퍼 올리던 아버지는 잠시 손을 놓고는 위아래를 살피더니 툭 던지듯 말했어.


  "뭐 이정도 긁힌 상처 가지고 그래. 나 때는 이보다 더 심하게도 다쳤었어."


  그리고 차에 운동화 있으니까 그걸 신고 오두막에 들어가서 발에 가시도 좀 빼라고 말했지.


  시무룩한 기분으로 신발을 갈아 신고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아버지의 배낭을 뒤져 상비약과 족집게를 꺼낸 뒤 발에 배긴 가시를 뽑기 시작했지. 하나씩, 하나씩. 살 속에서 가시들을 뺄 때마다 눈물이 핑 돌 만큼 따가웠다네. 그리고 아픈 만큼 그 과수원에서 봤던 노인에 대한 분노가 일었어.


  '뭐야, 난 단지 봉투 안을 열어 보려고 한 것뿐인데. 꼭 미친 사람 같았어.'


  생각은 저녁을 먹는 동안까지 계속 이어졌지.


  '그냥 말로 해도 되는 거잖아? 그런데 낫까지 휘두르면서….'


  잠자리에 누워서도 노인에 대한 분노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네. 청소와 몇 시간의 자동차 여행의 피곤 때문에 부모님은 금세 코를 골았지만 분노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어.


  한 두 시간 정도 뜬 눈으로 천장을 쏘아보다 마침내 이불을 걷고 일어섰지. 삐걱, 오두막의 문은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지만 이미 깊이 잠이든 부모님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계속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네.


  구름도 없는 하늘 위에는 보름달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어. 서늘한 밤공기를 들어 마시자 희미하게 달콤한 냄새가 함께 숨결 속에 스며들었지.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망설임은 그 순간 사라졌다네.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 흔들거리는 나무 그림자 사이로 거침없이, 거침없이. 보이지 않는 끈이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어.
  곧 과수원에 도착했지. 여기저기에서 새 하얀 봉투들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네.


  걸음은 제일 가까운 포도나무 나무 앞에서 멈춰 섰어. 아직 불안이 가시지 않아 주위를 살펴보지만 인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지.


  그렇게 가까이 가자 향기는 더 짙어졌지. 작약을 닮은 화려하고 달콤한 향이었다네.
  꼴깍. 입안에 고임 침을 삼키며 흰 봉투를 향해 손을 뻗었지. 하지만 질긴 줄기는 쉽사리 끊어 질줄 몰랐어. 다시 한 번 한 손으로는 나무줄기를, 한 손으로는 꼬투리를 잡고 잡아 힘을 주려는 사이 


  "이노오오오옴!!!!"


  노기 어린 노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던 게야.


  휙 하고 돌아보자 저만치 손에 묵직해 보이는 도끼를 들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네. 낮에 볼 때도 기괴했지만, 달빛 아래 낡은 옷을 펄럭이는 노인의 모습은 공포 영화에서 나오는 괴물처럼 보였어.


  "그 손 당장 놓지 못 할까아아!"


  길게 노성을 지르며 노인이 다가오기 시작했지. 걸음은 천천히 빨라지며 종국에는 뛰는 형세가 되었네. 마침내 노인은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어.


  다급 해지자 조금 전까지의 조심스러운 손놀림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냥 우악스럽게 포도송이를 잡아 뜯었지. 툭, 투둑. 손 안에서 포도 알들이 터지는 감촉이 선명했지. 포도 봉지를 움켜쥔 팔을 타고 끈적끈적한 과즙이 흘러내렸고. 그러거나 말거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두막을 향해 달렸다네.


  등 뒤에서 쿵 하고 무거운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기괴한 신음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 달리는 내도록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하지만 끝내 멈춰 설 용기는 없었어.


  어느덧 하늘엔 구름이 뒤덮기 시작하더니 달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칠흙 같은 숲을 한참 헤매야 했지.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희미하게나마 눈에 익은 풍경이 들어왔어. 긴장이 풀리면서 감각들이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지. 다리는 후들 거렸고 심장은 터질듯 뛰고 있었어. 무엇보다 나뭇가지에 긁힌 손등의 상처로 포도 과즙이 묻어서 쓰라렸지. 그래서 무의식 적으로 손등을 입으로 가져가 과즙을 핥았던 게야.


  전율이 일었다네.


  호흡도 채 가다듬지 못했고 팔 다리도 후들거리며 떨렸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어. 어둠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과즙으로 끈적거리는 봉투를 찢어냈지. 그리고 아직 성한 포도 알을 따내 껍질째 입안에 밀어 넣었네.


  단단한 치아로 둥근 알맹이를 힘껏 깨물자 매끄럽고 질긴 껍질이 터져 나가면서 말캉거리는 과육이 입 안으로 굴러 떨어졌지. 알맹이는 한낮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는지 미지근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황홀한 향과 달콤한 맛이 혀 안에서 가득 차올랐다네.


  달큰한 과육을 다 먹어 치운 뒤, 껍질을 뱉어내곤 정신없이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아직도 떨림이 가시지 않은 손으로 과즙으로 끈적거리는 봉투 안을 정신없이 파헤쳐 커다랗고 탄력 있는 포도 알들을 계속 입안으로 집어넣었지. 마치 다른 동물을 경계하며 먹이를 먹는 짐승 같은 모양으로.


  그러던 중, 손에서 포도 한 알이 미끄러졌다네. 한치 앞을 분간 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지. 아쉬웠지. 참으로 아쉬웠어. 하지만 아직 포도 알은 많이 남아 있었으니, 놓친 물고기는 그냥 잊어버리는 수밖에.


  호화로운 만찬을 즐긴 뒤, 피로와 포만감이 몰려왔지. 봉투는 그대로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어둠을 더듬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네. 부모님들은 미동도 않고 잠에 빠져 있었지. 조용히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다음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네.


  그리고 다음날, 눈을 뜬 것은 이른 아침이었어. 끔찍한 고통 때문에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거든. 고통의 근원은 오른쪽 눈이었지. 마치 불에 달군 돌덩어리를 눈에 박아 넣은 듯 했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손으로 눈을 더듬었다네. 그런데 눈이 있어야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아무 것도 없었던 거야. 덜렁거리는 눈꺼풀 안쪽은 텅 비어 끈적거리는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지!


  고통과 공포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었지.


  "어, 엄마! 엄마! 아빠아아! 아빠아아악!!"


  그러나 당연히 돌아와야 할 기적이 느껴 지지 않는 거야. 무게감 있는 두 개의 덩어리가 분명히 자신의 옆에 누워 있음에도 그들에게선 어떤 각성의 징조도 느껴지지 않았어.


  천천히 옆을 돌아보자, 거기에는 안구가 파헤쳐져 끈적거리는 피로 얼굴이 물든 두 구의 시체가 너부러져 있었다네.


  고통과 공포에 정신을 잃자 입에서는 절로 기성이 흘러 나왔지. 그리고 비틀거리며 오두막을 뛰쳐나갔네. 하지만 한쪽 밖에 남지 않은 눈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어. 결국 몇 걸음 가지 못해 넘어지고 말았지.


  지면에 부딪힌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수습하자 눈앞에 있는 붉은 색으로 물든 흰 봉투가 보였다네. 검고 희고 붉은 덩어리들이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었고. 누런빛의 가느다란 실 같은 다발들이 그 덩어리에 이어져 있지.


  뇌리에 어젯밤 맛보았던 달콤함과 말캉거리는 식감이 선명하게 떠올랐어.
  구역질이 일었지. 신물 말고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헛구역질은 한참이나 계속 되었네.
  그렇게 한참을 엎드려 있었어. 그리고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지. 숲이 있는 방향으로.


  숲에서는 축축한 흙과 낙엽이 썩는 냄새가 났어. 전날 맡았던 유혹적인 향은 마치 꿈결인 듯. 하지만 몇 번이나 넘어지고 미끄러졌지만 비틀 거리면서도 거친 길을 해쳐 나갔지. 그러는 동안 흙이 묻고 찢어져 옷은 넝마처럼 변해갔다네.


  희미하게 가라앉은 아침 안개 사이로, 마침내 그 곳이 모습을 드러냈지. 굼실거리는 나무줄기들은 멀리서 보기에도 바짝 말라 뒤틀려 있었어.


  천천히 과수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검게 썩고 벌레가 먹어 허물어진 나뭇가지 투성이였어. 어디에서도 푸른 나뭇잎 한 조각 찾아 볼 수 없었다네. 비에 삭은 텅 빈 포도 봉투들은 누렇게 빛이 바래 흔들거리고 있었어.


  걸음을 내딛는 중 발치에 체이는 묵직한 것이 있어 내려다봤지. 앙상하게 마른 노인의 시체였어. 역시 안구가 있어야할 자리에는 말라붙은 피 딱지만 자리하고 있었지.
 
-

 

  노인은 거기 까지 말하고는 구석에서 낡은 스마트 폰을 꺼내었다. 그리고 오래된 뉴스 영상을 플레이 한다.

 

  [주말여행을 떠난다고 나섰던 일가족이 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기 때문에 충격을 안겨 주고 있는데요.
  안구가 적출된 채 발견된 세구의 시체가 발견 된 것은 한적한 시골 마을. 이중 두 구의 시체는 부부로, 동반 했던 아들은 현제 행방불명 상태입니다! 다른 한구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노인으로 부부의 시신이 발견된 곳에서 한참 떨어진 버려진 과수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부부의 시신이 발견 되 오두막 옆에서는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수십 개의 훼손 된 안구가 발견되어 더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유전자 감식을 해봐야 밝혀지겠지만, 만약 정말 사람의 안구라면 희생자는 더 많을 것으로 ……! ……!]

 

  망연히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노인이 입을 열었다.

 

  "어떤가? 재미있게 들었는가?"
 
  노란 빛이 도는 외눈이 나를 보며 히죽 웃는다.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글쟁이들의 글 이야기]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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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우리알레
2012.02.10 00:17 깊은해구아래/단편





....ㅠㅜ
분명히 강조하지만,,,,
이 글의 주제는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벌칙 게임의 벌칙이었음을 밝힌다;ㅂ;





눈 앞에 '빛'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형용사를 붙일 수 있었다. 눈 처럼 새 하얗고 부드럽고 포근한. 그러나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는 '빛' 그 자체였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이유를 알수 없지만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면 나는 분명이 체면도 내팽겨 친채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울수 없었다. 눈물을 흘리는 눈물 샘도, 그 눈물 샘이 있는 눈도 그 눈이 있는 얼굴도 더이상 존재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왜? 멍하니 의문을 품었지만 머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다. 단지 본능에 의지해 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을 뿐이었다.
'녹아든다'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그 빛 안으로 스며들어가기 시작하자 천천히 모든 기억이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떠오른 기억은 이윽고 하나하나 빛이 바래면서 사라져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질 것이다.
어떻게 그걸 아냐고? 안다. 나는 분명히. 그러나 곧 그 사실도 머릿 속에서 잊혀지고, 곧 최초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건 붉은 색었다.

휴지에 묻어난 독기 있는 색. 나는 겁을 집어 먹었다. 그때의 나는 어렸다. 만약 지금의 나였으면 별거 아니라며 좌욕을 하면 조기에 예방이 가능하다고 말해 줄 수 있었겠지만, 당시 어린 마음에 나는 두려움과 수치심에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단지 속으로 삭일뿐이었다.

어느덧 나는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운동 부족과 균형잡히지 못한 식사는 자연스럽게 변비를 불러왔고, 휴지에 피가 뭍어 나는 횟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하지만 객기와 부끄러움 때문에 여전히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 답답함을 놀리듯 가끔씩 바늘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나를 관통하곤 했다. 그럴 때면 최대한 엉덩이를 의자에 닿지 않게 주의하며 몸을 뒤틀지 않으려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나이에 치질이라니 절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은밀한 이 고통은 매일 같이 나를 괴롭혔고, 결과 적으로 나는 수업에 집중을 못하는 순간이 늘어났다. 그 순간은 매우 커다란 차이를 불러 일으켰다. 결국 나는 그해 수능을 망쳤고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불행중 다행이랄까, 취업은 쉬웠다. 하지만 시련은 늘 나를 따라왔다. 연이은 회식은 내 지병에 악영향을 끼쳤고, 결국에 의자에 앉는 것도차 힘든 시가가 도래해 버렸다.
결국 나는 미뤄뒀던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거 수술이 쉽지 않겠는데요?'
대머리 의사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보통은 작은 혹 수준이지만 오랫 동안 방치를 했던터러 그 치핵이 많을 뿐더러 그 부분이 너무 비대해졌습니다.'
그가 나를 돌아보며 무겁게 말했다.
'수술후 자칫 관리를 잘못하면 항문 협착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경우입니다. 아무래도 입원을 하시는 편이.'
하지만 나에게 장시간 입원할 시간과 돈따우는 없었다.

 붉었다. 유리창은 내 몸에서 튄 피로 물들어 있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의아해 한것은 구름이 저 기 아래 쪽에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후 나는 차가 뒤집혔다는 것을 깨닳는다. 급작스러운 고통을 느끼고 자세를 바꾸느라 신호를 확인 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어디가 심하게 손상 되었는지 팔이며 다리가 제멋 대로 퍼덕거린다. 그 와중에서도 저기 뒤쪽 엉덩이 틈바구니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격통이 나를 괴롭히다. 그것은 내장이 밀려들어가면서 동시에 끄집어 내지는 고통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은 꼼짝도 안한다. 대신 끄으으 하는 억눌린 소리만 간신히 흘러 나왔을 뿐이다.
천천히 몸이 식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몸의 중앙을 관통 하는 그 끔찍한 고통은 최후까지 나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빛'이었다. 천천히 모든 것이 멀어져 간다. 뒤에서 부터 느껴지던 잔인한 압박감과 통증 역시 서서히 흐릿해지고 있었다.
아아, 마침내 안식이 도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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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우리알레
2011.12.21 10:26 깊은해구아래/단편


...으앗!

사람이 닥치면 한다는 말도,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 말도,
역시 진실이었다!!

아무튼,,,
기한내에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ㅂ;


...다 쓰고 읽어보니 닐 게이먼의,
샌드맨의 영향이 느껴진다 ;ㅂ;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 녕







  어느 순간부터인가 무엇인가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미친 듯이 그것에 몰두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주 사소한 것 까지 전부 알지 못하면 만족 할 수 없는 듯 나는 그것을 분해해 가장 깊은 곳 까지 파고 들어간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건 결국 그 대상을 완전히 믿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순간 "안녕."이라고 말해야 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젠 알 수 있다.

-

  그건 언제나 아주 힘든 일었다. 그 대상을 향해 쏟아 부었던 모든 것-그것이 증오, 혹은 사랑이라 해도 관계가 끝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쓰레기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그 대상을 향해 소모한 모든 시간과 자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어느 정도 나의일부를 구성하고 있었음에도 이젠 더 이상 아무런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매번 그 때마다 나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기분을 맛본다.
  어느 날인가, 마침내 나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간격을 두기로 결심한다. 홀로 있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무엇인가로부터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은 더욱더 참을 수 없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계를 넘어오려 했다. 하지만 나는 필사적이었고,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견고하고 교묘하게 바뀌었다. 그들은 그 보이지 않는 벽에 튕겨져 나가는 줄도 모르고 다시 멀어져갔다.
  나의 세상은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날 전까지는.

-

  많은 말이나 눈빛이 오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단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길지도 짧지도 않게 미소 지었을 뿐이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 그 미소가 빛나는 동안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 날아와 심장을 어루만졌다.
  그것을 뽑아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깎아져나가 아주 작아진 내 세계가 순식간에 휘감겨 버렸을 뿐이다. 마치 바오밥나무에 엉망이된 게으름뱅이의 별처럼. 뽑아버리기엔 너무 늦었다.
  더 이상의 선택권이란 없었다.

-

  그녀는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르면 일어난다. 그래, 알람을 맞추면 더 일찍 눈을 뜰 수도 있지만 그녀는 대부분 알람을 맞추지 않는다. 잠이 서서히 물러가는 동안 그녀는 이불 속에 누워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시야를 어지럽히는 빛을 바라본다.
  완전히 정신이 들기까지 필요한 십 여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볼일을 보고 짧은 샤워를 마친 뒤, 바스가운을 걸친 그녀는 물기에 촉촉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비비며 주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시리얼볼에 무슬리를 담고 요구르트를 붇는다. 딸기는 늘 한 알이다.
  그 다음엔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하며 TV를 켠다. 대부분의 경우 그녀는 뉴스가 나오는 방송에 채널을 고정한다. 오늘은 그녀를 불쾌하게 하는 기사가 있는 것 같다. 채널이 돌아간다. 무슬리를 씹어 먹는 그녀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식사를 마친 다음 양치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이제 그녀는 옷장 앞으로 간다. 바스가운이 발밑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유니클로의 속옷을 사랑한다.
  그녀가 입는 옷은 늘 같다. 검은색 바지에 흰 셔츠. 그리고 날렵한 라인의 검은 조끼. 그녀의 등은 곧고 아름답다.
  옷을 모두 입고 머리를 정성스레 빗어 넘긴 다음이면 그녀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웃어 보인다. 아름답고 우아한 깃털 같은 미소다.
  그리고 그녀는 집을 나선다.
  그녀가 지배인으로 있는 레스토랑은 바로 아래층에 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경비 시스템을 해제하고 그녀는 안에 들어선다. 입간판을 문 밖으로 내놓고 조명을 켜면 이제 레스토랑의 하루가 시작될 때이다.
  그녀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

  가게의 마감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계속 움직인다. 모든 일이 끝나면 대부분 시계는 자정을 알리고 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 하는 것을 본 다음에서야 그녀는 가게의 문을 닫고 경비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집에 한해서는 때때로 문단속을 잊곤 한다.

-

  그것이 그녀의 세계였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나의 세계다

-

  그녀는 매우 깊게 잠이 든다. 창밖에 번개가 번뜩여도 그녀는 계속 꿈속을 헤맨다.
  나는 주방으로 가 시리얼 볼에 무슬리를 담는다. 요구르트를 붇는다. 딸기는 할 알이다. 그리고 한 입 한 입 음미 하며 그것을 먹는다.
  다 먹고 난 뒤 나는 무슬리와 요구르트 스푼과 그릇을 정리한다. 문을 나서며 그녀가 잊은 자물 쇠를 잠근다.
  잠시 후, 해가 뜬다. 나는 그녀가 내가 호흡하던 공기 속에서 눈뜨기를 기다린다.

-

  하루는 그녀의 자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불을 움켜쥐고 몸을 작게 웅크리고 자는 그녀는 마치 어린 아이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목 뒷덜미의 머리카락을 잡는다. 새카만 머리 가락 사이로 흰 목덜미가 눈부시다.
  서걱. 새로 산 가위는 조용하고 신속하게 그 일을 해치웠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흔적을 남긴다. 손끝이 흥분으로 떨렸다. 그러나 베개 위에 떨어진 잘린 머리카락 조각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

  오늘은 그녀가 매우 들떠 보인다. 무슨 일일까. 늘 입던 아름다운 흑백의 제복은 옷걸이에 홀로 남겨져있다. 대신 그녀는 쇼핑에서 사온 A라인의 우아한 푸른 드레스를 입는다.
  흰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늘 가벼운 화장만 하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눈두덩이에 화사한 연분홍빛 셰도우가 빛나고 있다. 입술은 사랑스러운 체리 빛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 라인을 그린다.
  그때 현관에서 벨이 울었다. 그녀는 들뜬 걸음으로 문으로 다가간다. 내 심장은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화면을 현관으로 전환 시켰다.
  거기에 그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에게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준다. 기대감과 흥분으로 들뜬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안에서 슈즈케이스를 꺼낸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하늘 색 깃털로 장식된 구두 한 켤레가 들어있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조용히 그녀는 구두를 내려놓고 작은 발을 집어넣는다. 잠시 발끝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그를 향해 웃는다.
  그것은 내가 본적 없는 미소였다.

-

  그날 밤.
  그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그녀는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 했다. 부드럽고 온화한, 아침 햇살 속에 빛나는 금빛 먼지 같은 그런 사람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의 세계가 붕괴한다.

-

  그녀는 나의 세계 그 자체였다.
  이제 그녀의 세계 역시 붕괴해야 한다.

-

  잠든 그녀를 바라본다. 슬프고 아름다운 관경이다. 몽롱한 달 빛 아래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순결한 소녀 같은 얼굴로 잠들어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거짓임을 안다.
  나지막이 속삭인다.
  "안녕."
  생각보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이프는 날이 매우 잘 들었다. 몇 번인가 퍼덕 거리던 그녀는 서서히 조용해진다. 비릿하고 날카로운 향이 번진다.

-

  폐허 속에서 다시 새싹이 움틈을 느낀다.
  세계는 파괴를 통하여 정화 되었다.
  나는 새 생명을 얻었다.
  아침 해가 떠오른다. 나는 반짝이는 먼지들이 햇살 사이에서 춤추는 것을 나른한 눈으로 지켜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이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다.





이 밑은 1차 퇴고를 거친 내용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무엇인가'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미친 듯 그것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한 것 하나 까지 전부 알기 전까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불안함. 거기서 멀어지기 위해 나는 몰입 속으로 도망쳐야 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건 결국은 무엇인가를 완전히 믿지 못함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매순간 나는 "안녕."이라고 말해야 할 시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건 언제나 아주 힘든 일었다. 그 대상을 향해 쏟아 부었던 것은 - 증오, 혹은 사랑이라 할지라도 모든 관계가 끝나는 순간 전부 쓰레기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시간과 자원은 나의일부를 구성하고 있던 것임에도.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매번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기분을 맛본다.
  어느 날인가, 마침내 나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간격을 두기로 결심한다. 홀로 있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무엇인가로부터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은 더욱더 참을 수 없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계를 넘어오려 했다. 하지만 나는 필사적이었고,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견고하고 교묘하게 바뀌었다. 그들은 그 보이지 않는 벽에 튕겨져 나가는 줄도 모르고 다시 멀어져갔다.
  나의 세상은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날 전까지는.

-

  많은 말이나 눈빛이 오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단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길지도 짧지도 않게 미소 지었을 뿐이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 그 미소가 빛나는 동안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 날아와 심장을 어루만졌다.
  그것을 뽑아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깎아져나가 아주 작아진 내 세계가 순식간에 휘감겨 버렸을 뿐이다. 마치 바오밥나무에 엉망이된 게으름뱅이의 별처럼. 뽑아버리기엔 너무 늦었다.
  더 이상의 선택권이란 없었다.

-

  그녀는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르면 일어난다. 그래, 알람을 맞추면 더 일찍 눈을 뜰 수도 있지만 그녀는 대부분 알람을 맞추지 않는다. 잠이 서서히 물러가는 동안 그녀는 이불 속에 누워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시야를 어지럽히는 빛을 바라본다.
  완전히 정신이 들기까지 필요한 십 여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볼일을 보고 짧은 샤워를 마친 뒤, 바스가운을 걸친 그녀는 물기에 촉촉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비비며 주방으로 향한다.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시리얼볼에 무슬리를 담고 요구르트를 붓는다. 딸기는 늘 한 알이다.
  그 다음엔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하며 TV를 켠다. 대부분의 경우 그녀는 뉴스가 나오는 방송에 채널을 고정한다. 오늘은 그녀를 불쾌하게 하는 기사가 있는 것 같다. 채널이 돌아간다. 무슬리를 씹어 먹는 그녀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식사를 마친 다음 양치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이제 그녀는 옷장 앞으로 간다. 바스가운이 가느다란 발목 밑으로 떨어진다. 흰 엉덩이를 부드러운 레이스가 감싼다. 그녀는 유니클로의 속옷을 사랑한다.
  그녀가 입는 옷은 늘 같다. 검은색 바지에 흰 셔츠. 그리고 날렵한 라인의 검은 조끼. 그녀의 등은 곧고 아름답다.
  옷을 모두 입고 머리를 정성스레 빗어 넘긴 다음이면 그녀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웃어 보인다. 아름답고 우아한 깃털 같은 미소다.
  그리고 그녀는 집을 나선다.
  그녀가 지배인으로 있는 레스토랑은 바로 아래층에 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경비 시스템을 해제하고 그녀는 안에 들어선다. 입간판을 문 밖으로 내놓고 조명을 켜면 이제 레스토랑의 하루가 시작될 때이다.
  그녀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

  가게의 마감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계속 움직인다. 모든 일이 끝나면 대부분 시계는 자정을 알리고 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 하는 것을 본 다음에서야 그녀는 가게의 문을 닫고 경비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집에 한해서는 때때로 문단속을 잊곤 한다.

-

  그것이 그녀의 세계였다.
  이제 그것은 나의 세계다.

-

  그녀는 매우 깊게 잠이 든다. 창밖에 번개가 번뜩여도 그녀는 계속 꿈속을 헤맨다.
  나는 주방으로 가 시리얼 볼에 무슬리를 담는다. 요구르트를 붓는다. 딸기는 한 알이다. 그리고 한 입 한 입 음미 하며 그것을 먹는다.
  다 먹고 난 뒤 나는 무슬리와 요구르트, 스푼과 그릇을 정리한다. 문을 나서며 그녀가 잊은 자물 쇠를 잠근다.
  잠시 후, 해가 뜬다. 나는 그녀가 내가 호흡하던 공기 속에서 눈뜨기를 기다린다.

-

  하루는 그녀의 자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불을 움켜쥐고 몸을 작게 웅크리고 자는 그녀는 마치 어린 아이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목 뒷덜미의 머리카락을 잡는다. 새카만 머리 가락 사이로 흰 목덜미가 눈부시다.
  서걱. 새로 산 가위는 조용하고 신속하게 그 일을 해치웠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흔적을 남긴다. 손끝이 흥분으로 떨렸다. 그러나 베개 위에 떨어진 잘린 머리카락 조각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

  오늘은 그녀가 매우 들떠 보인다. 무슨 일일까. 늘 입던 아름다운 흑백의 제복은 옷걸이에 홀로 남겨져있다. 대신 그녀는 쇼핑에서 사온 A라인의 우아한 푸른 드레스를 입는다.
  흰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늘 가벼운 화장만 하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눈두덩이에 화사한 연분홍빛 셰도우가 빛나고 있다. 입술은 사랑스러운 체리 빛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 라인을 그린다.
  그때 현관에서 벨이 울었다. 그녀는 들뜬 걸음으로 문으로 다가간다. 내 심장은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화면을 현관으로 전환 시켰다.
  거기에 그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에게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준다. 기대감과 흥분으로 들뜬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안에서 슈즈케이스를 꺼낸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하늘 색 깃털로 장식된 구두 한 켤레가 들어있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조용히 그녀는 구두를 내려놓고 작은 발을 집어넣는다. 잠시 발끝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그를 향해 웃는다.
  그것은 내가 한 번도 본적 없는 미소였다.
  그리고 결코 나를 향하지 않을 미소였다.
  나의 세계가 붕괴한다.
-

  그날 밤.
  그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그녀는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 했다. 부드럽고 온화한, 아침 햇살 속에 빛나는 금빛 먼지 같은 그런 사람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

  그녀는 나의 세계 그 자체였다.
  이제 그녀의 세계 역시 붕괴해야 한다.

-

  잠든 그녀를 바라본다.
  몽롱한 달 빛 아래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순결한 소녀 같은 얼굴로 잠들어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거짓임을 안다. 슬프고 아름다운 광경이다.
  나지막이 속삭인다.
  "안녕."
  생각보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이프는 날이 매우 잘 들었다. 몇 번인가 퍼덕 거리던 그녀는 서서히 조용해졌다.
  비릿하고 날카로운 향이 번진다.

-

  폐허 속에서 다시 새싹이 움틈을 느낀다.
  세계는 파괴를 통하여 정화 되었다.
  나는 새 생명을 얻는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반짝이는 먼지들이 햇살 사이에서 춤추는 것을 나른한 눈으로 지켜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이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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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0 20:03 깊은해구아래/단편



제시문 : 감기라는 소제를 사용하여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평소와 다른 묘하게 들뜬 기분에 어리둥절해했다. 지난밤 밤을 지새워 가며 으르렁 거리던 이웃집 개들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한 까닭인지 머리는 몽롱하고 무거웠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부스스해진 머리카락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살랑거린다. 낡은 전기장판으로 데워진 이부자리 속과는 달리 방안의 공기는 시렸다. 오한에 몸이 작게 떨렸지만, 그녀는 곧 멍하니 일어서서 늘어진 가디건을 어께에 걸쳤다.
  느릿느릿 주방으로 들어가 그릇을 꺼내고 씨리얼과 우유를 부어 말아 먹고는 다시 느릿느릿 그릇을 개수대에 가지고가 헹군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천천히 샤워를 했다.

  물기 촉촉한 머리카락으로 욕실을 나설 때는 막 눈을 떴을 때 보다는 한결 상쾌해졌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몽롱한 상태였다. 

  “오늘이 일요일이어서 다행이네.”

  멍하니 중얼거리며 무의식중에 손으로 이마를 쓸던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어머, 열이 있었네?”

  이제 그녀는 왜 평소와 기분이 달랐는지 알 수 있었다. 묘하게 들뜬 기분이었던 이유는 높은 체온 때문이었다. 좀 더 천천히 상태를 체크해 보자 목도 따끔거리며 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곤 오늘의 계획을 수정했다. 일주일만의 휴일이었지만 서점에 들렀다 영화를 보고 단골 카페에 들러 수다를 떠는 것은 지금 상태로는 무리였다.

  그렇게 결심한 뒤엔, 세탁실로가 쌓여있던 흰 빨래들을 전부 세탁기 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부엌으로 가 찻물을 올리고 어제 저녁 읽다가 내려둔 책을 집어 들었다. 5페이지 정도 읽자 물이 끓기 시작했다. 시나몬 향이 듬뿍 배어있는 애플티를 우린 다음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세탁기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가 문 너머로 멀어진다. 

  이불을 덮고 따뜻한 요 위에 앉아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들리는 것은 사락사락 종이 넘기는 소리와 초침이 움직이는 틱틱 거리는 소리와 문 너머에서 아련히 스며드는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음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책의 반 정도를 읽었을 때, 세탁기의 알림 음이 울렸다. 이제는 거의 다 식어버린 찻잔을 들고 홀짝이던 그녀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찻잔과 책을 내려놓고 다시 서늘한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간다.

  잠시 뒤 그녀는 빨래 한 뭉터기를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이불위에 잠시 빨래를 내려두고 방 한쪽 구석에 접어두었던 빨래 건조대를 폈다. 그리고 하나하나 주름지지 않게 잘 털어 건조대에 걸었다. 약간은 지루하지만 일상적인 작업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준다.

  일을 끝낸 뒤 그녀는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빨래를 너는 동안 식은 몸을 따스한 온기가 감싼다.

  잠시 후, 그녀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뱉으며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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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8 20:36 깊은해구아래/단편


 



제시어 : 잃어버린 반지, 영수증, 계단

 

 

저기 저 푸른 숲속에는 도깨비 한 마리가 살고 있대.
그 도깨비는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소원을 들어준대.
하지만, 명심해. 그건 딱 한 번뿐이래.

 

 

*    *    *

 

 

"여기가 맞나, 김군?"


그는 삐딱하게 서서 아파트 비상계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였기 때문에 계단은 여기저기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부스러진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럼 맞고말고요. 여기가 분명합니다."


소년은 확언했다.


"자, 저기 보세요. 저기 저 구석에. 그림자가 흔들리는 게 보이죠?"


과연 소년의 말대로 음습한 기운이 계단 쪽에서 솟아올라 배회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여유 자작한 태도로 걸어 계단 쪽으로 향한다.
묘하게 웅얼거리면서 어디에서 들리는 건지 방향을 가늠하기 힘든 소리가 들렸다.


[없어, 어디 간 거지, 보이지 않아….]


좀 더 가까이 가자 흐릿한 남자의 형상이 땅을 기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찾아야해, 찾아야해, 찾아야해.]


필사적으로 중얼거리며 배회하던 그림자는 계단을 기어 내려오다 그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발치에 막혀 멈춰 섰다. 독기 어린 울림이 공중에 울려 퍼진다.


[방해, 방해다. 비켜, 비켜, 비켜. 찾아야해, 찾아야해, 찾아야 하니까.]


그림자가 하는 말을 무시하며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찾고 있는 것이 반지인가."


오직 바닥만을 보던 그림자가 최초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안구마저 일그러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얼굴.
그가 낡은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그건 환불 받았잖아. 여기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고."


그림자는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듯 영수증을 잠시 바라보다 흥미를 잃은듯 다시 바닥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지, 반지, 반지. 세상에서 제일 크고 아름다운 반지. 반지를 그녀에게 선물해야해.]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소년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가엾은 사람이죠. 며칠 전 옥상에서 뛰어내려 이 계단 모서리에 떨어졌는데, 그 뒤로 여기서 이렇게 배회하고 있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림자는 웅얼거리며 필사적으로 반지를 찾는다.


[반지, 반지, 반지. 내 사랑, 사랑, 사랑, 그녀에게 가져가야해. 반지, 크고 아름다운 반지.]


"의뢰인이 아무리 그의 청혼을 매몰차게 거절 했다고 하지만 어리석은 선택이었죠."


남자가 돌아보자 소년은 빙그레 웃어보였다. 생각을 읽기 힘든 그 미소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그림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봐."


그림자는 그에게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그는 말을 계속했다.


"저기 하늘을 봐. 저기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반지가 있으니."


그 말에 그림자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림자는 천천히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거기에는 태양이, 서서히 거대한 짐승이 집어 삼키듯이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


[아 ,아, 아!]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탄성이 울리는 동안 마침내 태양은 어둠에 물들었고, 마치 얇은 금가락지 같은 태만 남아 빛을 발했다.


[반지, 반지, 반지, 세상에서 제일 크고 아름다운, 반지, 반! 지!]


환희에 물든 목소리로 그림자는 손을 내민다. 그리고 흐릿한 빛마저 지나치게 그에게는 강하다는 듯, 서서히 물에 모래가 씻겨가듯 사라진다.


식이 끝난 뒤엔 낡은 계단은 낡은 계단일 뿐. 더 이상 음습함도, 한이 서린 목소리도, 슬퍼 보이는 남자의 몸짓도 존재 하지 않았다.


"이제 끝난 건가요?"


조금 멀찌감치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의뢰인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몸에 꽉 끼는 호피무늬 미니스커트 위로 속옷이 거의 다 비처보이는 얇은 블라우스를 팔랑이며 여자는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섰다.


"네, 끝났답니다."


소년이 웃는 낯으로 말하자, 그녀의 얼굴이 확 피었다.


"아아, 다행이다! 안 그래도 싼 아파트 값, 재수 없다고 더 떨어질 뻔 했는데…."
"그러셨나요?"
"그럼요! 잘 나가는 변호사인줄 알고 열심히 꼬셨더니, 다이아 하나 못살 고시생이었지 뭐예요? 그나저나…"


여자는 남자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담겨있었다.


"오빠, 정말 대단하다! 정말 못하는 게 뭐야?"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유혹적인 몸짓으로 달라붙었다.


"오늘 뉴스에 금환식이 있단 말 없었는데, 오빠 정말 짱 대단하다!"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원은 하나 뿐 이예요. 두 번째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소년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매달릴 뿐이었다.


"오빠, 오빠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나 소원 하나만 더 들어주면 안 될까? 응 딱 한 가지만!"


여자가 무슨 말을 하던, 어떤 행동을 하던 무관심으로 대하던 남자는 소원이란 말에 눈을 빛냈다.


"소원, 소원을 들어 달라 이건가?"


반응이 오자 여자의 목소리에 더욱 교태가 어린다.


"응, 오빠, 딱 한 가지만 들어줘. 그러면 내가 뭐든지 할게, 응?"
"뭐든지?"
"응, 뭐든지!"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본 여자의 얼굴이 뱀 앞의 생쥐처럼 굳었다.
그것은 크고 흉폭 한 미소였다. 검붉은 입속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

 


저기 저 푸른 숲속에는 도깨비 한 마리가 살고 있대.
그 도깨비는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소원을 들어준대.
하지만, 명심해. 그건 딱 한 번뿐이래.
욕심이 나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도깨비가 잡아 먹어버린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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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우리알레
2010.11.03 11:18 깊은해구아래/단편

 

  “안녕하세요.”

  고양씨가 야옹 야옹 거리며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늑대씨가 히죽 웃으며 답했습니다.

  “오래간 만이네요.”

  고양씨가 실눈을 더욱더 가늘게 하며 인사합니다.

  “네, 그러게 오래간 만이네요.”

  늑대씨는 날카롭게 삐져나온 송곳니를 더욱더 잘 보이게 입을 벌려 웃으며 인사했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고양씨가 묻자,

  “뭐 요즘 양 한 마리를 잡아서 따시고 배부르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늑대씨가 대답합니다.

  “뭐라도 좀 드셔야죠?”

  고양씨가 메뉴판을 꺼내 들어서 늑대씨에게 건네줍니다. 늑대씨는 종이를 휘척휘척 넘기다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커피로 하겠습니다.”

  “네, 그럼….”

  고양씨는 종업원을 불러 커피 한잔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개다래나무 차를 시켰습니다.

  늑대씨가 말했습니다.

  “고양씨는 잘 지내셨나요?”

  눈을 가늘게 뜨고 고양씨가 답합니다.

  “요즘 쥐가 많이 돌아 다녀서 조금 바빴답니다.”

  “바쁘셨군요.”

  늑대씨가 말하자 고양씨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했습니다.

  “네.”

  그리고는 날카로운 발톱을 꺼내어 까끌까끌한 혀로 깨끗하게 정돈했습니다.

  “몇 마리 잡기는 했지만, 아직 너무 많아서 다 잡지는 못했답니다.”

  그때 점원이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고양씨와 늑대씨는 꾸벅 인사를 하며 차를 받고는 후루룩 한 모금 마시곤 잔을 내려 두었습니다.

  둘은 잠시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고양씨는 눈을 가늘게 하고 늑대씨를 바라보았고, 늑대씨는 이를 드러내며 조용히 웃습니다.

  고양씨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차가 맛있네요.”

  늑대씨가 답했습니다.

  “네, 맛있군요.”

  늑대씨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다시 말했습니다.

  “한 모금 드시겠습니까?”

  고양씨는 내밀어진 잔을 받아 들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향긋함이 입 안 가득 퍼졌습니다. 고양씨는 야옹야옹 웃으며 말했습니다.

  “커피 향이 아주 좋군요.”

  늑대씨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네.”

  고양씨가 다시 말했습니다.

  “추운데 있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와서 마시니 더 좋은 것 같네요.”

  그리고 다시 호르륵 호르륵 커피를 마십니다.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자꾸 마시다 보니 어느새 잔이 다 비어버렸습니다.

  “어머, 제가 커피를 다 마셔버렸군요.”

  늑대씨가 어깨를 들썩여 웃으며 말했습니다.

  “리필 해 드릴까요?”

  고양씨는 야옹 야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종업원이 와서 빈 잔에 커피를 채워주고는 물러났습니다. 고양씨는 커피잔을 늑대씨의 앞에 다시 돌려놓았습니다.

  늑대씨가 하품을 하며 말합니다. 입을 크게 벌려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아주 잘 보였습니다.

  “하아암, 졸리네요. 어제 양 좀 잡는다고 늦게 까지 자지 못했거든요.”

  “저런 피곤하시겠네요.”

  “그렇지요.”

  늑대씨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머리를 긁적이다 말을 이었습니다.

  “그거 아세요?”

  “네? 뭘 말이죠?”

  고양씨가 묻자 늑대씨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습니다.

  “양을 잡을 때 말입니다….”

  양을 덮치는 시늉을 하더니 늑대씨가 말을 계속했습니다.

  “전에 잡았던 양의 가죽에 몸을 비비면 양이 제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죠.”

  “호오!”

  고양씨가 동그란 노란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습니다.

  “저도 쥐를 잡을 때는 그렇게 해봐야겠군요!”

  늑대씨가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네, 한번 해보세요. 냄새가 완전히 지워져서 전혀 모를 겁니다.”

  고양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합니다.

  “네, 그렇겠어요.”

  늑대씨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커다랗게 하품을 했습니다.

  “하아아암, 정말 피곤하네요.”

  스푼으로 개다래나무 차를 떠 마시던 고양씨가 말했습니다.

  “잠깐 눈이라도 부치세요.”

  늑대씨가 눈가를 훔치며 말했습니다.

  “그래야 하려나본데요.”

  야옹야옹 웃으며 고양씨가 말했습니다.

  “지난번엔 제가 졸았었지요.”

  “하하, 그랬었지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늑대씨가 웃었습니다. 지난번에는 고양씨가 친구 고양이들과 밤새도록 쥐를 잡고난 뒤여서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왔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고 말았었지요.

  늑대씨는 기지개를 켜고 팔짱을 꼈습니다. 그리곤 곧 잠이 들었습니다.

  고양씨는 조용히 차를 마시면서 그 모습을 바라봅니다.

  고양씨는 늑대씨에게 다가가 여느 고양이들이 그러듯 뺨을 부벼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늑대씨의 잠을 방해하기 싫어서 그만 둡니다. 대신 고양씨는 조용히 늑대씨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고양씨에게 있어 좋아하는 사람의 옆을 지키는 것은 여느 고양이들이 그러듯이 커다란 즐거움이니까요.

  고양씨는 늑대씨의 모습을 노랗고 커다란 눈에 한가득 담고 마치 그 풍경이 도망갈까 걱정이라도 되는 듯 눈을 가늘게 뜹니다.

  금빛 액자 속에서 늑대씨가 숨을 쉬는 소리가 작게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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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우리알레
2010.02.06 18:07 깊은해구아래/단편

2004년, 판소 카페 묘사 대행진에 내려고 쓰던 글이었는데

3000자를 4000자로 잘못 기억 하는 바람에 적기만 하고 참가는 못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시험 기간인데 공부도 안되고 하고 끄적였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녀석은 상당히 못난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길고양이치고 샴 같은 우아함을 지닌 녀석을 찾아보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나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녀석들이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허나 녀석은 절대 그런 고고하고 깔끔해 보이는 고양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길고양이 중에서도 정말 못난 축에 속해있었다.

녀석의 머리는 밤톨 같이 둥글 넙적한 느낌으로, 마늘쪽 같은 작은 귀가 말 그대로 붙어 있는 식으로 달려 있었다. 눈은 심술궂은 모양으로 쫙 찢어져 있으며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는 코는 작은 조약돌을 박아 둔 것처럼 느껴졌다. 또한 배는 늘 죽 처져 있었으면서도 두터워 보이는 꼬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도도하게 곧추서 있었다. 이렇듯 매우 비우호적인 시선을 던지고 싶게 하는 녀석의 외형 중에서도 결정타를 날리는 최악의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것은 진창에 담갔다 빨다만 걸레처럼 얼룩덜룩한 털가죽이었다.

고양이 중에도 얼룩이 있는 고양이는 상당히 많은 축에 속한다. 일단 우리나라에 있는 고양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길고양이들은 그 혈통이 마구 잡이로 뒤섞이기 때문에 얼룩이 없는 녀석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얼룩 있는 동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눈가에 검은 반점이 있는 강아지라든가 이마에 애교 있는 줄무늬가 그어진 고양이들은 오히려 환영할 정도이다.

그러나 녀석의 몸을 뒤덮고 있는 얼룩은 정말 그 정도가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못난 것이었다. 얼룩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알기 힘들 정도로 제멋대로인데다가 짙은 갈색과 고동색, 황토색의 털이 제각각의 길이로 멋대로 자라있는 모습은 정말 녀석이 흙탕물 속에서 방금 걸어 나온 것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에겐 묘하게도 사람들이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아니, 실은 저런 굉장한 모습 자체가 한 번 더 돌아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었다. 내가 녀석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역시 저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못생긴 모습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녀석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알기 힘들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었을 지도 모르고 내가 온 이후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녀석을 만난 것은 이곳에 오게 된 뒤로부터 딱 1년이 되는 날이었다는 것이다.

그날은 지독하게 우울한 날이었다. 햇빛은 쨍쨍했고 구름은 한점도 없었다. 어릴 적 보던 책에서 말하던 좋은 날의 조건임이 분명했건만 나에게는 조금도 좋은 날씨로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이라는 바람은 모두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쳐버렸는지 답답하고 끈적끈적한 공기가 내 숨통을 조여 왔고 발을 내딛을 때 마다 이는 흙먼지는 옷을 뿌옇게 물들어 있었다. 입고 있던 얇은 남방은 땀에 흠뻑 젖은 지 오래였다. 차라리 비라도 내렸으면 좋았으련만, 야속한 하늘은 나를 익혀버리기라도 할 작정인양 티 없이 맑고 파란 하늘만을 내려 줬다. 허나 하늘을 향해 욕을 한다 해도 저 심술궂고 제멋대로인 녀석이 순순히 들어줄 리가 만무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투덜거리면서도 가파른 언덕을 올라갈 수밖에.

숨을 헐떡이며 무거운 발걸음을 놀렸다. 들고 있는 책의 무개가 내 팔을 길게 늘여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이지 저 언덕 아래로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비싼 책이었기 때문에 봐준다는 심정으로 버텼다.

마지막 인내와 마지막 힘을 자아내어 결국 나는 그 언덕위에 올라 설수 있었다. 나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온몸에서는 땀 냄새가풍기고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으며 옷은 먼지투성이였을 것이 자명했지만 그런 것은 전혀 눈치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봐라, 하늘아. 네가 나를 시기하여 이런 시련을 내렸지만, 나는 가뿐하게 이 시련을 이겨 낸 것이다!’

누가 들었으면 미친 것 아니냐며 손가락질 할만한 소리를 마음속으로 크게 외치며(그래봤자 가슴속인데 커봤자 얼마나 크려고) 땀을 식히기 위해 기숙사 앞에 있는 벤치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녀석과 눈이 마주치고 만 것이다!

녀석은 시원한 그늘아래 몸을 길게 누이고 유우자작하게 혀로 털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그늘 밑에서 쉬려던 생각도 잊고 그 오묘한 털가죽을 살피고 말았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녀석의 털은 정말 전에 없이 이상한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허나 그것을 손질 하는 녀석의 모습은 마치 화려한 갈기를 다듬는 사자마냥 도도하기 이루 말한 수 없었다. 정녕 카리스마까지 느껴질 정도로 당당한 털 고르기였다.

그러다 녀석이 나의 기척을 눈치 챘다. 호박에 칼로 흠집은 내놓은 듯한 찢어진 눈이 번뜩이며 노려보았다. 이에 당황한 나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녀석과 대치 아닌 대치 상태를 이루고 말았다. 분명히 녀석은 못생긴 도둑고양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강한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러왔다. 그 눈. 그 쭉 찢어진 눈이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환상이 들 정도였다.

‘고양이인 나도 이렇게 청결한 몸가짐을 하고 있는데 인간인 주제에 그렇게 더럽다니! 내 근처엔 오지 말라고!’

물론 고양이가 정말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쪽으로는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기억 상으로는 그 대치 상태는 약 5분쯤 지속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 하면 황당하단 생각이 들었다. 대체 도둑 고양이과 눈싸움을 하느라 5분 동안이나 땡볕 아래에 서있는 것이 말이 되냔 말이야.

여하튼 길고도 짧은 시간이 끝난 뒤 녀석은 허무 하리 만치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마치 나 같은 것은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도도하게.

며칠동안 그 뒷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화가 났다. 고작 고양이에게 겁먹어서 이 나의 고운 피부를 태양 아래 노출 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는 당장 탐문에 들어갔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녀석에 대하여 물어보자 벤치에서 얼쩡거리기 시작 한 것이 몇 주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벤치 앞을 지날 때 마다 그 밉살스러운 녀석을 찾게 되었다. 머리 속으로는 온갖 복수를 꿈꾸며.

허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더 이상 그 벤치에서 녀석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조금 전에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때마다 헐래 벌떡 그 곳으로 향하지만 이상하게 녀석의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허탕 치는 횟수가 늘어 날 때 마다 나의 복수심은 커져만 갔다. 그와 함께 녀석을 제압하기 위함 아이템-개다래 열매, 고양이 먹이 등- 역시 다양해 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왔다. 녀석을 만난지 일주일이 되던 날. 나는 지난주와 마찬 가지로 무거운 책들을 들고 비탈길로 올라서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이날 역시 하늘이 심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따사로운 태양 빛이 나의 온몸을 열심히 달궈주었다. 아스팔트가 깔린 길은 봄도 아닌데 아지랑이가 아른거렸다. 그러나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언덕길을 정복했다.

‘하하하! 봐라, 태양이여! 나는 네가 던진 시련 따위는 가볍게 이겨낼 수 있단 말이다!’

역시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나는 햇빛을 피하기 위해여 벤치로 다가갔다. 그리고 번뜩이는 호박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곳 들은 참으로 두서없고 비논리적이었으며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아주 큰 것부터 소소 한 것 까지 갖가지 상상이 머리 속에서 뛰쳐나오려 버둥거렸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자잘한 사념들을 쓸어버리고 내 머리 속에서 승리를 차지 한 것은 참으로 단순한 충동이었다. 나는 그 충동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대로 몸은 맡겼다. 즉, 벤치 가까이로 다가가 고양이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이며 쯧쯧쯧- 하는 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한 이 행동에 심히 당황하고 말았다. 정말 겨우 생긴 기회인데 그동안 꿈꿔온 복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니 복수는 둘째 치더라도 부른다고 저 고양이가 내게 다가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밉살 스러운 녀석이 순순히 내게로 다가와 그 둥글넙적한 머리를 내 손에 비비적 거린 것이다! 밉살스러운 실눈이 애교있게 휘었고 갸르릉 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자극 했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묘하게 설레인다.

아아.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고양이 녀석이 미웠던 것이 아니다. 그저 신경쓰여서 어떻게 할수 없을 정도로 좋아 하고 있던 것 뿐이다. 자신도 모르게 바보 같은 미소가 얼굴에 걸렸다.

"하, 하하하."

나는 멍청한 웃음을 흘리며 작열 하는 태양도 잊고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열 중했다.



PS. 다음날 아침, 후배 녀석이 그 못난얼굴의 고양이와 다정하게 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된거냐고 묻자 후배녀석 왈,

"부르니까 오던데요?"

흥! 그녀석의 정체는 지조 없는 들고양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이미 사랑에 빠진 것을.그러니 오늘도 기다려라!! 나의 사랑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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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우리알레
2010.01.18 15:14 깊은해구아래/단편





  늦은 시간. 사위가 온통 어둠 속에 가라앉은 가운데, 희미한 달빛 속에서 풀벌레들이 노래한다. 이제 8월도 다 끝나가는 시기이건만 오늘따라 견디기 힘든 열기가 밤의 공기 속에 감돌고 있다.


  소녀는 더위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 속삭이듯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어서 꿈속에 빠져들라 채근하듯 조용조용히 울렸지만 잠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수를 헤아려 볼까. 아니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우유를 마시는 거야. 머리맡에 양파를 가져다 두는 수도 있지.


  몇 가지 잠을 이루기 위한 소소한 민간요법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지난날의 경험에 의하면 큰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아니, 그보다는 귀찮음이 더 컸음이라.


  그렇게 더위와 싸우며 침대 위에서 뒹굴던 소녀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왼쪽 엄지발가락으로 파워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왼손과 오른손으로는 스피커와 모니터를 켜는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위잉 파앗 딕딕딕딕. 익숙한 소음과 함께 윈도우가 실행되자마자 오른손은 마우스를 다부지게 움켜잡고 익스플로러를 실행시킨다. 재빠르게 키보드 위로 자리 잡은 양손은 자판 위를 오가며 짤막한 문장을 만들어 냈다.


  빨리 잠드는 방법.


  리듬감 있게 엔터를 누르자 잠시 화면이 하얗게 변한 뒤 곧이어 색색의 문자 나열들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빨리 잠드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정말 미치겠어요. 사실 저는 여름에는 잠을 잘 자는 편이였는데요, 요즘 들어 새벽 5시까지…


  응, 나도 미치겠어.


  안녕하세요, 님 혹시 스트레칭 해보셨나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전신의 긴장을 풀어주면 좋다던데여.


   물론, 해봤다!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해보면 어떨까요? 언제나 같은 시간에 자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면 생체리듬이…


  그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 


  잠을 잔다고 해서 세포가 쉬는 것은 아니고…


  어쩌라고?


  예상했던 바이지만 내용은 부분 신빙성이 없거나 지금 당장 실행하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소녀는 입술을 뿌루퉁하게 부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깊이 잠들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텐데.


  그런 생각에 잠겨 성의 없이 드래그를 하는 도중, 한 검색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길고 짧은 설명도 없이 단 하나의 간결한 문장이 거기에 있었다.


  [빨리 잠드는 방법]


  가느다란 손가락은 망설임도 없이 링크를 클릭했다.


  그리고 동시에 암전.


  가벼운 전자음을 남기고 모니터와 컴퓨터와 스피커의 전원이 꺼졌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발끈 했다.


  잠깐, 나 지금 낚인 거야? 이거 신종 바이러스 유포 수법? 아니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설마 하드가 날아간 건 아니겠지?


  허둥지둥 컴퓨터의 파워를 키려고 하는 순간, 낯선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키... 키....


  처음에는 기묘한 풀벌레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는 의외로 이상한 소리를 내는 생물들이 많은 법이니까.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기계음에 가까운 울림임을 알 수 있었다.


  키...쿠...ㅋ...


  소녀는 천천히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기묘한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히 전원이 꺼져있는 상태인데도 그 소리는 멈출 생각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쿠...ㅋ...ㅋ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리는 점차 선명해졌고, 명확한 울림으로 변해 갔다.


  ...ㅋ.... 키...쿡.......


  응? 뭐라고 하는 거지?


  쿠..ㅋ...키.....


  순간 머릿속에서 반짝하고 불이 켜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 어두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시린 형광등의 빛이 눈앞을 메운다. 눈에 익은 앞치마와 조리도구, 각종 식재료들이 그 앞에 늘어서 있었다. 재빠르게 압 치마를 맨 뒤 그녀는 필요한 재료를 골라 집었다.


  버터 130g, 계란 1개, 호두 30g, 설탕 70g, 에스프레소 1oz, 박력분 200g, B.P 4g,


  자, 그럼 신나게 만들어 볼까?


  먼저, 버터와 계란을 실온에 꺼내 둔 뒤, 박력분과 B.P는 체를 쳐두고 호두는 오븐에 130도에서 7분가량 굽습니다. 호두가 다 구워지면 잘게 다져두세요. 실온에서 적당히 부드러워진 버터를 크림 화 시킵니다. 그리고 설탕을 넣고 잘 혼합한 뒤 계란을 넣고 분리되지 않게 다시 혼합, 그 다음 에스프레소를 1샷을 뽑아서 넣고 또 혼합한 뒤, 가루 류를 넣고 가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섞어줍니다. 마지막으로 호두를 넣고 잘 섞은 뒤 180도로 예열한 오븐에 15분간 구워주면 끝!


  방을 나선지 20분 후. 소녀는 한바구니 가득 잘 구워진 쿠키를 들고 침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바구니를 스피커 앞에 내려두고는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가서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시 후, 소녀는 고른 숨소리를 내뱉기 시작했고 작게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스피커 쪽에서 울렸다.


  사각사각, 아삭아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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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우리알레
2008.12.08 11:52 깊은해구아래/단편


1. 광기에 대한 이미지.
2. 직, 간접적인 감정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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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파는 여윈 손으로 점토 덩어리를 반죽했다. 표면이 말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반죽을 누를 때마다 딱딱한 덩어리가 부서지며 미세한 먼지를 날린다. 그녀는 손끝에 걸리는 마른 가루 뭉치들은 꾹꾹 눌러, 가르고 부순다. 그리고 가볍게 물을 축인 뒤 섞기를 반복한다. 가끔 너무 단단해서 부서지지 않는 덩어리들이 손끝에 걸릴 때도 있는데, 그러면 그 들을 골라내어 옆으로 치워버렸다. 

  가늘고 주름진 손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고 확고한 손놀림으로 그 지루한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꾹 꾹. 땀이 배어 나와 주름진 이마 위로 맺혔으나 그녀는 잠시 멈춰 그것을 닦아 내는 나태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노란빛이 도는 눈은 번뜩이는 시선으로 점토 덩어리를 주시할 뿐이다. 열정적인 침묵에 잠겨. 

  이윽고 점토 덩어리는 부드럽고 매끄럽게 변했다. 이제 그녀는 점토를 빚어 하나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한다. 

  새하얗고 작은 손가락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움직인다. 그것은 꽃 위에 내려앉는 나비와도 같다. 혹여나 형태가 부서질까 두려워하듯. 그러나 숨을 죽이고 먹이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마귀의 앞다리처럼 머뭇거림 없이 점토를 가르기도 한다. 기척도 없이 날카롭게. 

  고동색의 흉한 덩어리들이 점차 형체를 띠어간다. 이마와 눈, 눈썹. 코와 인중 아래로 단정한 입술이 자리 잡는다. 뺨, 턱을 지나 귀로 이어지는 우아한 선. 매끄러운 목과 쇄골.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소녀의 연분홍빛 입술에 환희가 걸린다. 

  온기 없는 흙빛 입술 위로 소녀의 입술이 천천히 미끄러진다. 꽃잎을 닮은 입술을 타고 뜨거운 한숨이 흘러나온다. 따뜻한 온기가 잠시나마 차가운 진흙 덩이 위를 감돌았다. 살짝 감긴 눈꺼풀이 들뜬 듯 전율한다. 달콤한 떨림이다. 입맞춤.

  그리고, 금기를 범한 자는 언제나 그만한 대가를 치른다.

  비명, 고함, 그리고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

  처녀의 손가락이 아름다운 흉상 위로 박혀 든다. 그녀는 그것을 움켜쥐고는 책상 위로 내던졌다. 우상은 너무나도 간단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여인의 또 다른 폭력이 연심의 잔해 위로 쏟아진다. 침, 발작과도 같은 구토, 욕설, 자기 비하적인 언사, 발길질. 물병이 넘어지면서 테이블 아래로 떨어져 깨진다. 흙탕물과 함께 날카롭게 깨어진 유리 조각이 난산한다. 조각 하나가 다리로 튀었다. 예리하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얀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 붉은빛이 흙탕물 위로 조용히 엉켜든다.

  문 너머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하나, 둘, 셋, 네 명. 그중 하나는 분명히 그일 것이다. 복도를 타고 울리는 구두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와는 반대로 격하게 뛰던 심장의 울림은 잦아든다. 느릿느릿 하고 긴 호흡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다. 그것은 엉망으로 어질러진 방 안의 풍경과는 달리 평온했다.

  문이 열리며 그들이 병실로 뛰어들어왔다.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단정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져있었다. 그 아래에서 다정하던 눈이 당혹감에 떨고 있었다.

  소년은 웃으며 답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선생님. 단지, 구역질이 나는 바람에 물병을 깨트렸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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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우리알레
2008.12.05 16:54 깊은해구아래/단편




  그곳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러나 흔하지 않으며, 넓지도 좁지도 않고, 인적이 드물지 않으나 사람의 발길이 많지도 않는 작고 오래된 골목 귀퉁이 어딘가에 있었다. 그 나무문은 골목이 생길 때부터 자리하고 있었고, 이제는 마치 골목의 일부인 것처럼 흐릿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그 곳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 문은 특별한 것이었다.

  머리, 혹은 가슴 속, 아니면 마음, 심장이라 불리는 것의 한쪽 구석에서 필요를 느끼면 언제든 방문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원하는 만큼 머물다 내키는 때 떠날 수 있는 곳.

  갈색의 낡은 나무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만 큰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이 손끝으로 살짝만 밀어도 부드럽게 열린다. 안으로 들어서면 당신은 부드러운 커피 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빛이 스며드는 창가 앞에는 금빛 먼지들이 춤춘다.

  그 아래 자그마한 화분들이 사이좋게 늘어 서있다. 작지만 예쁜 꽃을 피운 것도 있으며 파릇한 잎을 뽐내는 녀석들도 있다.

  홀에는 작은 테이블들이 늘어서 있다. 색깔도 모양도 모두 제각각 이었지만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만은 닮은꼴이다.

  그는 그 테이블 중 한 곳에 앉아 있었다. 보통 키에 적당한 체구. 편안해 보이는 옷차림. 검은 머리카락 아래에는 단정한 모양새의 하얀 가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석고로 만들어진 가면은 조금 까칠한 질감이었지만 매우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순진무구한 소년 같은 표정. 죄를 범하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할 어린아이와 같은.

  그는 무엇인가를 생각 하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이다. 빈 커피 잔이 그 앞에서 차게 식어가고 있다.

  그 옆을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가다 멈춰 섰다.

  여자였다.

  길고 낡은 드레스는 만지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것처럼 바래있었다. 매우 얇은 천을 겹겹이 둘러 만든 치맛자락은 발끝만 겨우 보일 정도로 길다. 손에는 잔과 쿠키가 올려져있는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잔에서는 따스해 보이는 김이 모락모락 흘러나왔다. 

  여인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인사 했다.

  “안녕.”

 그는 그녀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지며 답했다.

  “안녕.”

  그리고 곧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겨들어 입을 다물었다.

  여인은 그를 잠시 내려다보다 트레이를 테이블에 내려 두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따뜻한 잔을 들어 올려 호호 불고는 후르륵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셨다.

  향긋한 커피의 향과 여인이 만들어내는 소음에 남자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면 안쪽 반짝이는 시선과 여인의 부드러운 눈빛이 마주쳤다.

  그가 물었다.

  “너 누구야?”

  여인은 기척 없이 웃으며 답했다.

  “니 반쪽.”

  그는 곧바로 부정했다.

  “거짓말 하지 마.”
  “그래, 아닐 수도 있고.”

  그녀가 순순히 인정하자 그는 오히려 초조해졌는지 시선을 빈 커피 잔 위로 떨구었다. 여인은 그 모습을 조심스레 살피며 잔을 만지작거렸다.

  불편하고 긴 침묵이 이어지고 있는데, 순간 여인의 발치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이성적인 행동이라기보다 그것은 호기심에 이끌린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거기에는 작은 나사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붉은 녹 자국이 있고 쇳가루와 희미한 기름칠의 흔적이 남은 오래된 철 조각.

  “아….”

  여인의 입에서 낮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놀람이라기보다는 좀 더 일상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길을 걷다 우연히 운동화 끈이 풀린 것을 발견 했을 때 와 같은.

  그녀는 천천히 몸을 숙여 손가락으로 나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다 나사를 향해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런 다음 손끝으로 톡톡 치며 먼지를 털어내 고는 품속에 조용히 갈무리 했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물었다. 그늘진 가면 안쪽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뭐야?” 

  여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 이거. 나사.”
  “나사?”

  남자가 되묻자 그녀는 어린애처럼 웃으며 다시 답했다.

  “응, 나사.”
  “어디서 나온 건데?”

  그의 노골적인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그것은 일종의 잔혹성 까지 띄고 있었다-여인은 말없이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성마른 손가락은 그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는 순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딘지 우월감에 젖은, 그러나 억눌린 웃음소리가 작게 울린다.

  “뭐야, 낡았잖아. 그러다 언젠가 멈춰버리는 거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독기 어린 말이 조소에 섞여 흘러 나왔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가시가 그녀를 상처 입히기 위해 고의 적으로 흩뿌려진다.

  그러나 그녀는 상처받은 기색도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언젠간 멈출 거야.”

  여인의 반응이 뭔가 불만족스러웠는지, 혹은 생각 하던 것과 달랐기 때문인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그런 표정을 보이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던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그래?”

  그는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를 따라서 여인 역시 고개를 돌려 보았으나 거기에서 무엇을 발견 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결국 그를 행해 다시 물어야 했다.

  “뭐가 잘못 됐어?”

  열심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자는 그의 가면 안쪽의 표정을 살피려 노력했다. 그러나 눈 이외의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여인이 계속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 이 소리 들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소리? 무슨 소리?”
  “이 소리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르겠는데? 무슨 소리가 들린 다는 거야?”

  그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소리가 안 들린단 말이야? 잘 들어봐. 이 소리는 착한 사람의 귀에만 들리는 거니까.”

  그러나 여인은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나지막이 키득 거렸다.

  여인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마치 커다란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 나쁜 사람이야.”

  남자는 웃음을 멈추려는 듯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으나 그의 어깨는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어렵게 한 자신의 선언을 조금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그녀는 조금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너, 내말 안 믿는 구나?”

  그제야 그는 웃음기를 거두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왜 니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데?”

  호기심에 반짝거리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여인은 천천히 말했다.

  “내 머릿속에서 얼마나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 넌 분명히 놀랄걸?”
  “머릿속?”
  “그래 머릿속.”
  “진짜로 하는 건 아니고 생각으로만?”

  그녀가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웃지 마, 난 진지 하단 말이야!”  

  그녀는 정말 화가 난 듯 했고, 그제야 자신의 태도를 조금 반성한 것인지 남자는 성실하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 한건 아니고 그냥 머릿속에서 생각만 한 거라면서?”
  “응, 그래.”
  “그런데 왜 니가 나쁜 사람인데? 그냥 생각만 한 건데.”

  그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에 그녀는 차근차근 설명 해 주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런 상황은 자주 겼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조금 번거로울 뿐이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야.”
  “안전?”

  그가 멍하니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전. 난 끔찍한 상상을 머릿속에서 하고, 실제로도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날 싫어할 걸 알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뿐이야.”

  여인은 눈가에 웃음을 머금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어?”  

  그녀의 표정은 조금 의기양양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는 할 말을 잊었는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무슨 의미야?”

  그녀가 조금 토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는 내뱉듯이 빠른 어조로 말하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말이야.”

  강한 명령조의 목소리.

  “아까 왜 내 반쪽이라고 말 한 거야?”

  대답은 짧고 단순하게 돌아왔다.

  “그냥.”
  “그냥?”

  기가 차다는 듯 그가 되묻자 여인은 작게 변명을 늘어놓듯 중얼 거렸다.

  “그럴 지도 모른다고…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 한 것뿐이야.”

  남자는 가면 안쪽에서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단지 그것뿐이야?”
  “응.”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미안.”

  작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이마를 짚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인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미안, 정말 미안해.”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은 고개를 숙이곤 조용히 자신의 잔에 손을 뻗어 커피를 홀짝였다. 커피는 거의 다 식어 미지근해 져 있었다. 

  “가면 말이야.”

  그녀는 잔을 내려다보며 느린 어조로 말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을 느낀 것인지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내깔린 눈동자 위로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잔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가면을 만든 것도 너니까, 네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 했어.”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자 그녀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촉촉한 물기 어린 목소리는 수줍은 듯 점점 작아졌지만, 마지막 한 단어 까지 분명히 말했다.

  “니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말을 건거야.”

  그는 말없이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숨소리마저 감추려는 듯 미동도 없이.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정염이 그 속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 눈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여인은 살짝 시선을 피했다. 뺨이 붉어졌다.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 잔을 들어올려 커피를 홀짝였다. 이제는 다 식어버려서 맛도 향도 흐릿해 졌지만 그녀는 그런 것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입술에서 잔을 땐 그녀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쿠키를 들어 올려 야금야금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툭 던지듯 물었다.

  “맛있어?”

  그녀는 과자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쿠키 하나는 금세 그녀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그녀는 두 번째 것에 손을 뻗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그녀는 과자를 입에 넣으려다 말고 대답했다.

  “응? 너도 이거 먹을래?”

  여인이 과자를 내밀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 

  “왜 화를 안낸 거야?”

  그녀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는 내뱉듯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까 내가 너한테 멈춰버릴 거라고 말했잖아.”

  그제야 여인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고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아아, 아까 그 말?”
  “그래, 그 말.”

  답하는 그의 표정은 조금 지쳐보였다. 허나 그녀는 조금도 그런 것은 눈치 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넌 사실을 말한 거잖아. 그런데 왜 화를 내야해?”
  “그런 말 하면 기분 나빠 하는 게 보통이잖아.”
  “그래?”

  그가 힘주어 답했다.

  “그래.”

  하지만 여인은 여전히 어린애처럼 눈을 깜빡이며 답할 뿐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피한다고 안 멈추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생긋 웃으며 남자에게 다시 쿠키를 권했다. 그는 이번에는 군말 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갈색의 잘 구워진 쿠키에서는 아몬드 향이 났다.

  잠시 동안 생각에 빠져있던 남자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섭잖아, 멈춘다는 건.”

  여인은 남자의 손끝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왜 무섭다고 생각 하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과자의 귀퉁이를 잡고 으스러트렸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보기 좋은 손가락 사이로 갈색의 가루가 흘러내려 테이블 위를 뒹군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머리카락 사이로 어둡게 그늘져 있었다. 

  “그건 모든 게 끝나버린 다는 말이니까.”

  그 목소리에서는 어떠한 징조 같은 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여인은 그 속에 풍기는 두려움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또한 슬픔과 무엇인가를 향한 그리움이 그 안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 역시.   
   
  여인은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손등 위에 올렸다. 그리고 말없이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울다가 지친 아이를 위로 하 듯 상냥하게.

  가면 안쪽에서 사납게 흔들리고 있던 눈빛이 천천히 고요해 졌다. 습기 어린 반짝임이 잠시 비쳤다가 조용히 감기는 눈꺼풀 아래로 숨어든다. 

  얼마인가 시간이 흐른 뒤 비로서 그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조금 가라 앉아 쉰 듯이 낮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누군가와 약속을 했었어.”

  여인은 살짝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거기 까지 말한 다음 그는 가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깊이 공기를 들이 마신 다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음 생에는 쌍둥이로 태어나자고. 그렇게 약속 했었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거 부러운 이야기네.”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너도 끼워줄까?”

  여인은 가타부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수줍게 미소 짓는 그 표정은 거절의 의사 따위는 조금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잠시만.”

  그는 여인의 손 밑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고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거칠지만 단정한 손이 멀어져 가자 그녀는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어디 가려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슬쩍 미소 지었다.

  “응, 커피 리필 하려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신의 잔을 집어 들었다.

  “아, 그래 다녀와.”

  베시시 웃는 여자의 얼굴을 남자는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여인은 그의 기척이 자신의 등 뒤로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쿠키를 베어 물었다. 와삭.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의 접시에 있던 쿠키를 다 먹었고, 커피 잔 역시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여인은 조용히 일어나 트레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카운 터를 향해 걸었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사용 했던 것이 분명한, 그러나 이미 식어버린 커피 잔과 아름다운 하얀색 가면이 놓여 있었다.

  여인은 트레이를 내려 두고는 조심스럽게 가면을 들어 올렸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년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품안에 끓어 안고 잠시 동안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눈물이 말랐을 무렵, 그녀는 여전히 그것을 소중히 품에 않고 카페의 문 앞에 섰다.

  가녀린 손이 부드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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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1 17:21 깊은해구아래/단편

 

어두운 곳(동굴, 방, 감옥 등 장소는 상관없습니다)에 혼자 있습니다.

다음의 예 중에서 하나의 상황을 선택해 써주세요.

1. 주변을 더듬다가 무언가를 만집니다.

2. 무언가가 점점 다가옵니다.

장문 단문을 한 번씩 번갈아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것은 네가 나를 떠난 지 한 달 하고도 일곱 번째 날에 벌어진 일.

   

  눈이 떠졌다. 어떤 기척이나 소리도 없었지만 마치 무엇인가에 부름이라도 받은 듯, 나는 그렇게 갑작스레 꿈속에서 걸어 나와야 했다.

  때는 깊은 밤. 평소 잠이 들기 전에 집안의 모든 불을 끄기 때문에 이 작은 방은 짙은 어둠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사위가 고요하다. 밤의 그 넓고 평온한 품에 안겨 만물이 깊은 잠에 빠지기라도 한 듯. 평온한 안식이 그곳에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 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왔으며 그때마다 몇 번이나 후회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번에도 같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이불 속에서 손을 빼내어 오른쪽 다리 옆을 더듬는다. 손끝이 떨린다. 그곳에 무엇도 존재 하지 않을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손끝에 닿는 것이 있었다. 부드러운 털가죽의 감촉. 그것은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으며, 작게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익숙한 떨림. 나지막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귀속을 선명히 파고든다. 눈앞이 흐려졌다.

  그 순간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온 인사말에 놀라면서도 나는 다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 꼬리를 타고 뜨겁고 차가운 액체가 흘러내리더니 천천히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든다.   

 감사합니다.

  내 작은 고양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기회를 돌려줘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비록 순간에 불과한 꿈일 지라도, 눈을 뜨면 부서져 흩어질 파편에 불과할지라도. 

 

  나지막한 속삭임은 계속 되었다. 샛별이 지고 선명한 아침 햇살이 감겨진 눈꺼풀을 부드럽게 두드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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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7 01:31 깊은해구아래/단편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결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그 거대한 몸을 깊은 숲속으로 이끌어간다.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벗들을 찾아. 멈추지 않고, 머뭇거림도 없이. 지치고 노곤한 몸을 재촉하여 나무 그림자 사이로 서서히 걸어 들어간다.  걸음을 땔 때 마다 우아한 목과 다리가 흔들린다. 조용히 멈춰 서 있노라면, 그는 마치 한그루의 묘한 나무처럼 보일 것이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두발 달린 짐승들. 조용히 숨을 죽이고, 대지의 뼈와 나무의 살로 만든 송곳니와 발톱의 세운다. 탐욕에 그 혼을 맡긴 듯 번뜩이는 시선. 


  그는 천천히 움직이던 다리를 멈춘다. 두발달린 짐승들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멈추지만, 폭력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벼려진 칼날을 결코 보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고자 할 뿐. 마치 기원이라도 하는 듯. 고고하게 그 긴 목으로 우러러 하늘을 본다. 일찍이 그의 선조들은 저 위를 자유롭게 노닐었을 것이다. 허나, 기나긴 평안 속에서 그는 날개를 손질하는 것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지금 하늘 가득 차오른 것은 검은 연기. 독한 향은 폐부로 스며들어 별들마저 침묵시킨다. 그는 하늘 향하여 노래했다. 낮고 멀리까지 울리는 목소리가 길게 울린다. 그 뒤를 검은 야수들이 잔인하게 덥덮쳐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대지. 우리의 선조들이 노래해 왔던 낙원의 문을 걸어 잠군 것은 그들 스스로였다.


  마지막 모아는 그렇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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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8 15:32 깊은해구아래/단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잘 벼린 칼날에 빛이 반사되어 희게 빛났다. 손가락을 가져가면 금방이라도 베일 것 같다고 생각하자 더욱더 손을 뻗는 것이 두려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두려워할 여유가 없기에, 그녀는 자신을 채근하여 떨리는 손을 억지로 내밀어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형광등의 흰 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눈앞을 어지럽힌다.


  제단에는 마치 우유 같은 흰 빛의 피부를 가진 희생양이 조용히 눕혀 있었다. 갈색과 녹색의 흙투성이 옷들은 이미 발밑에 뜯겨져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고 흰 피부는 정갈한 물로 닦이어 투명한 물방울이 어려 있었다. 평온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위로 조용히 숨결조차 멈춘 채 칼날을 가져다 댄다. 우아한 하늘빛 눈동자가 흔들린 듯 보인 것은 그저 칼날에 어린 빛이 보인 착각에 불과할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 아래에 자리 잡은 눈썹은 마치 화가 난 듯 치켜 올라가 있었으므로.


  잠깐의 망설임 끝에, 칼날은 잔인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희생물의 여린 피부 속으로 서늘한 금속 조각이 파고든다.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그 작은 몸을 반으로 가른 뒤, 다시 그 것을 작게 토막 낸다. 그녀는 그것이 아주 작은 직사각형이 될 때 까지 결코 손을 멈추지도,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저 마치 이 끔찍한 행위를 어서 끝내고 싶다는 듯이 기계적으로 손을 놀릴 뿐이었다.


  이윽고 칼날이 그 춤을 멈추고 여인의 손에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을 때,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는 촉촉이 물기가 어려 있다. 맥 빠진 미소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하, 하하하하!”


 그녀는 천천히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눈시울을 훔치려다 말고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엄마, 엄마! 양파 다 썰었어요! 그런데 눈이 너무 매워서 아무것도 안보여. 도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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