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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단편

반지


 



제시어 : 잃어버린 반지, 영수증, 계단

 

 

저기 저 푸른 숲속에는 도깨비 한 마리가 살고 있대.
그 도깨비는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소원을 들어준대.
하지만, 명심해. 그건 딱 한 번뿐이래.

 

 

*    *    *

 

 

"여기가 맞나, 김군?"


그는 삐딱하게 서서 아파트 비상계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였기 때문에 계단은 여기저기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부스러진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럼 맞고말고요. 여기가 분명합니다."


소년은 확언했다.


"자, 저기 보세요. 저기 저 구석에. 그림자가 흔들리는 게 보이죠?"


과연 소년의 말대로 음습한 기운이 계단 쪽에서 솟아올라 배회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여유 자작한 태도로 걸어 계단 쪽으로 향한다.
묘하게 웅얼거리면서 어디에서 들리는 건지 방향을 가늠하기 힘든 소리가 들렸다.


[없어, 어디 간 거지, 보이지 않아….]


좀 더 가까이 가자 흐릿한 남자의 형상이 땅을 기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찾아야해, 찾아야해, 찾아야해.]


필사적으로 중얼거리며 배회하던 그림자는 계단을 기어 내려오다 그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발치에 막혀 멈춰 섰다. 독기 어린 울림이 공중에 울려 퍼진다.


[방해, 방해다. 비켜, 비켜, 비켜. 찾아야해, 찾아야해, 찾아야 하니까.]


그림자가 하는 말을 무시하며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찾고 있는 것이 반지인가."


오직 바닥만을 보던 그림자가 최초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안구마저 일그러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얼굴.
그가 낡은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그건 환불 받았잖아. 여기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고."


그림자는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듯 영수증을 잠시 바라보다 흥미를 잃은듯 다시 바닥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지, 반지, 반지. 세상에서 제일 크고 아름다운 반지. 반지를 그녀에게 선물해야해.]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소년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가엾은 사람이죠. 며칠 전 옥상에서 뛰어내려 이 계단 모서리에 떨어졌는데, 그 뒤로 여기서 이렇게 배회하고 있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림자는 웅얼거리며 필사적으로 반지를 찾는다.


[반지, 반지, 반지. 내 사랑, 사랑, 사랑, 그녀에게 가져가야해. 반지, 크고 아름다운 반지.]


"의뢰인이 아무리 그의 청혼을 매몰차게 거절 했다고 하지만 어리석은 선택이었죠."


남자가 돌아보자 소년은 빙그레 웃어보였다. 생각을 읽기 힘든 그 미소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그림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봐."


그림자는 그에게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그는 말을 계속했다.


"저기 하늘을 봐. 저기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반지가 있으니."


그 말에 그림자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림자는 천천히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거기에는 태양이, 서서히 거대한 짐승이 집어 삼키듯이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


[아 ,아, 아!]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탄성이 울리는 동안 마침내 태양은 어둠에 물들었고, 마치 얇은 금가락지 같은 태만 남아 빛을 발했다.


[반지, 반지, 반지, 세상에서 제일 크고 아름다운, 반지, 반! 지!]


환희에 물든 목소리로 그림자는 손을 내민다. 그리고 흐릿한 빛마저 지나치게 그에게는 강하다는 듯, 서서히 물에 모래가 씻겨가듯 사라진다.


식이 끝난 뒤엔 낡은 계단은 낡은 계단일 뿐. 더 이상 음습함도, 한이 서린 목소리도, 슬퍼 보이는 남자의 몸짓도 존재 하지 않았다.


"이제 끝난 건가요?"


조금 멀찌감치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의뢰인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몸에 꽉 끼는 호피무늬 미니스커트 위로 속옷이 거의 다 비처보이는 얇은 블라우스를 팔랑이며 여자는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섰다.


"네, 끝났답니다."


소년이 웃는 낯으로 말하자, 그녀의 얼굴이 확 피었다.


"아아, 다행이다! 안 그래도 싼 아파트 값, 재수 없다고 더 떨어질 뻔 했는데…."
"그러셨나요?"
"그럼요! 잘 나가는 변호사인줄 알고 열심히 꼬셨더니, 다이아 하나 못살 고시생이었지 뭐예요? 그나저나…"


여자는 남자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담겨있었다.


"오빠, 정말 대단하다! 정말 못하는 게 뭐야?"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유혹적인 몸짓으로 달라붙었다.


"오늘 뉴스에 금환식이 있단 말 없었는데, 오빠 정말 짱 대단하다!"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원은 하나 뿐 이예요. 두 번째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소년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매달릴 뿐이었다.


"오빠, 오빠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나 소원 하나만 더 들어주면 안 될까? 응 딱 한 가지만!"


여자가 무슨 말을 하던, 어떤 행동을 하던 무관심으로 대하던 남자는 소원이란 말에 눈을 빛냈다.


"소원, 소원을 들어 달라 이건가?"


반응이 오자 여자의 목소리에 더욱 교태가 어린다.


"응, 오빠, 딱 한 가지만 들어줘. 그러면 내가 뭐든지 할게, 응?"
"뭐든지?"
"응, 뭐든지!"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본 여자의 얼굴이 뱀 앞의 생쥐처럼 굳었다.
그것은 크고 흉폭 한 미소였다. 검붉은 입속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

 


저기 저 푸른 숲속에는 도깨비 한 마리가 살고 있대.
그 도깨비는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소원을 들어준대.
하지만, 명심해. 그건 딱 한 번뿐이래.
욕심이 나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도깨비가 잡아 먹어버린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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