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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의궤적

새해가 밝았을 때, 그렇게 손을 내밀수 있기를 기원하며... - 꽃밭에 길을 묻다 : 김선우






 

 

[나는 아이에게 가만히 손을 내밀었지요. 원한다면 내 수술실에 와도 좋아.]

새해가 밝았을 때, 그렇게 손을 내밀수 있기를 기원하며... 








꽃밭에 길을 묻다 : 김선우
 

1

어젯밤 나의 수술대에는 한 아이가 올라왔습니다. 작고 노란 알약 같은 아이의 얼굴. 신경들이 싸늘한 슬픔으로 명랑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수술용 장갑을 끼었지요.

 

 

2

아이가 내 수술실에 노크한 건 지난 봄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태백에 가는 길이었지요. 태백산 지천으로 만발한 철쭉꽃. 수혈 받으러 오라는 꽃들의 전갈을 받고 더러워진 내 피를 버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식당칸 열차에서 바람이 허공에 절벽을 만드는 걸 무료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사북을 지날 때였어요. 버려진 폐광이 전족을 한 여자처럼 뒤뚱거리며 골짜기 사이로 곤두박질치는 길 끝에 회백색 슬레이트 지붕이 보였지요. 산벚꽃나무였던가요. 꽃그림자 소슬한 평상 위에서 한 소녀가 기찻길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오도카니 모은 무릎, 기차를 바라보며 소녀는 긴 머리채를 하염없이 빗질하고 있었지요.

 

그때 그 태백행, 노랗고 질긴 점액이 접시 끝에서 늙은 꽃술처럼 떨어져내렸지요. 외로움과 공포를 한꺼번에 알아버린 어린 짐승의 충혈된 눈이 천제단 붉은 철쭉 꽃잎 속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오지마, 오지마, 꽃대궁을 분지르며 나는 소리쳤지요.

 

 

3

그 아일 다시 만난 건 올여름입니다.

 

지독한 폭우의 끝. 여위고 남루한 것들이 먼저 휩쓸려 주저앉고 유복한 성곽들은 더욱 당당해지더군요. 희망이라는 病을 버릴 수 없었으므로 가난한 아버지들의 삽질 소리는 멎지 못하고 범람한 하천에 깨진 유리구슬로 떠내려왔지요. 그 여름의 끝에서 그앨 본 겁니다. 널어놓은 이불홑청 붉은 목단 꽃무늬가 작열하던 담벼락 끝, 깨진 벽돌을 움켜쥔 아이가 금 간 담장 밑에 오도카니 서 있었지요. 녹슨 자전거바퀴와 빈 라면상자가 길 잃은 염소처럼 엎으려 있었구요. 햇빛이 바큇살에 걸려 챙강거리며 울었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합니다. 행인 몇이 병나발을 불며 지나갔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어요. 깨진 벽돌조각을 꼭 움켜쥐고 하염없이 서 있을 뿐이었지요.

 

그때 그 사내아이 일렁이는 눈그림자, 사북을 지나며 본 소녀의 얼굴임을 나는 단박애 알아찰 수 있었습니다. 얘야, 해바라기를 보러 오지 않을래? 나는 아이에게 가만히 손을 내밀었지요. 원한다면 내 수술실에 와도 좋아.

 

 

4

해바라기/긴 꽃대궁을/타고 오르는/잿빛 쥐

씨앗을 파먹힌/해바라기/슬픈/음부로

흘러드는/안개/젖빛 따뜻한/달의 피

 

안개 짙은 달밤, 씨앗을 파먹힌 해바라기를 통과해 어젯밤 그 아이가 내게 왔습니다. 아이의 긴 머리칼에서 달이 흘린 피냄새가 났습니다.

나는 깨진 벽돌을 움켜쥔 아이를 안아 수술대에 눕혔지요.

나의 늑골 위에서, 고산식물처럼 고개를 외로 틀고 아이는 곧 잠들었습니다. 꽃그늘 일렁이는 아이의 가슴팍, 나는 조심스레 메스를 그었지요.

 

 

5

나의 아이는 무사합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수술이었어요. 산벚꽃잎을 열자 철쭉이, 철쭉 꽃술을 열자 붉은 목단이 뭉클거리며 피어올랐지요. 젖빛 따뜻한 달의 피가 아이의 심장으로 흐르고, 나는 해바라기를 꺾어 잔인한 물살 위에 얹어주었습니다. 노랗게 빛나는 총신이 물살을 끌어당기며 폭죽처럼 씨앗을 쏘아올리더군요. 창밖에 능소화, 炎天을 능멸하며 핀다는 그 꽃이 제 꽃대궁 속에 두레박을 내려 길을 묻고 있었습니다. 印章처럼 붉은 달이 태양의 뒤편에서 서늘하고 뜨겁게 차오르는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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