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에 어린 빛이 서늘한 궤적을 만들어낸다. 이윽고 붉은 액체가 거칠게 대기 중으로 튀어 오르고, 매끄러운 갑옷 표면위에 붉은 얼룩이 늘어난다. 허나 그는 피를 뒤집어쓰고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다시금 검을 내리 긋는다.
등 뒤에서 덮쳐오는 기색을 느끼자 상체를 회전시켜 적의 공격을 피하며 팔꿈치로 다가오는 머리를 내리찍는다. 이윽고 허물어진 상대의 등에 검을 박아 넣은 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뽑아들고는 왼쪽에서 크게 베어오는 남자의 품속으로 흘러든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겨드랑이에 치명적인 상처를 새기자 다시금 피가 쏟아진다.
눈가로 뿜어진 피를 살짝 고개를 돌림으로써 피하자 그것들이 고스란히 뺨 위를 물들인다.
허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적들을 베고, 베고, 또 벨뿐이다. 남자는 적진에서 퇴각 신호가 아스라이 울리기 전까지 피에 굶주리기라도 한 듯 광란에 찬 검을 휘둘렀다.
이윽고 사위가 조용히 가라앉자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허공에 휘둘러 검신을 휘어 감고 있던 살점과 핏방울들을 말끔히 떨어쳐냈다. 서늘한 푸른빛을 되찾은 검은 이윽고 검 집 안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무엇을 위해 그런 무자비한 검을 휘두르는 건가요?”
그는 고개를 돌려 말을 걸어온 소년을 바라보았다. 흰 로브를 입은 상냥한 갈색 눈의 아이. 백색은 신의 상징. 소년은 신관이었다.
“이상론을 펼칠 생각은 없어요. 전장이란 타인을 베려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평온한 곳이 아니니까. 허나 당신의 검은 살기위해 상대를 밴다고 하기에는 너무 날카로워.”
그의 무정한 시선과 신관의 다정한 눈빛이 엇갈렸다. 날이 선 칼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날카로운 시선이건만, 여려 보이는 갈색의 눈동자는 도무지 시선을 피할 줄을 몰랐다.
신관은 재차 물어왔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검을 드는 겁니까?”
그는 신관의 그저 한 없이 선량해 보이는 얼굴을 잠시 더 바라보다, 이윽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안의 나약함을 죽이기 위해서.”
그 말에 신관의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나약하다고요? 당신이가? 아하하, 거참 말도 안 돼는 이야기를 하는군.”
소년은 잠시 자신이 있는 곳이 전장이라는 사실도 잊고는 헛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이봐요, 이 전장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벤 것은, 또 가장 제 몸을 사리지 않는 것은 바로 당신이란 말이에요. 이 이상 더 얼마나 강해지려고 그러는 겁니까?”
허나, 그는 소년의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천천히 본진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관은 이를 놓칠세라 잰 걸음으로 따른다. 그러면서도 질문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허면 무엇을 위해 강해지려고 하는 건가요? 무엇이 그대를 그리 광기에 휘둘리게 하느냔 말이에요.”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허나 신관은 그가 고개를 돌려 하늘에 떠오른 하얀 달을 바라 본 것을, 일순 그 날이 선 칼날 같은 표정 아래 희미한 미소가 어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미소를 띠게 한 것이 그를 전장에 서게 한 이유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피를, 그 많은 피를 뒤집어쓰고도 버리지 못할 나약함이라면 더 이상 그것을 피하려 하지 말란 말입니다.”
등 뒤에서 소년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리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제발…, 제발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잊으란 말이야!”
절규.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이었다. 슬픔과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 허나 그의 마음은 이미 오래 전에 결정지어져 있었다.
그는 눈을 감는다. 마치 달이 태양을 가리듯. 눈꺼풀 아래로 그 매서운 눈빛이 잠겨든다. 그러자 등 뒤에서 선명하게 전해져 오던 소년의 기척이 멀어져 간다. 마치 세상에서 지워져 버린 듯.
이윽고 눈꺼풀이 열리며 드러난 그 갈색 눈동자는 곧고 흔들림 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본진에서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달려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기나긴 싸움 뒤 평온한 안식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입술을 타고 차가운 작별의 인사가 흘러나왔다.
“안녕히, 내 안의 어린 소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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