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깊은해구아래/감성사전

매, 난, 국, 죽, 먹


- 매 -

짙은 고동색 가지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눈송이.
그 사이로 수줍게 피어오른 연분홍빛 향기에,
행인은 가던 길을 잊고
찬 바람 부는 겨울 돌담 가를 한참 서성인다.


- 난 -

 작고 가녀린 난초가 있었다.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꽃을 피운 난이었지.
예고도 없이 볼품없는 초록빛 꽃망울이 맺히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었다.
허나, 채 피기도 전에 어린 아이의 손짓
한번에 무참히 뜯기어져 나가버렸지.
작고 가녀린 난초가 있었다.
길을 가다 난을 볼 때면
그 여린 초록빛이 아직도 선연히 떠오른다.

  

- 국 -

티앙페이.
이 아가씨는 수줍음이 많아 각별한 보살핌이 필요하단다.
유리로 만든 길고 투명한 방을 마련해,
따스한 물을 담고,
그 속에 살며시 넣어주렴.
조금만 기다리면 아름답게 피어날 테니. 

 

- 죽 -

쌍골죽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 있니?
이 녀석은 다른 대나무와는 달리 속이 꽉 틀어 막혀있지.
그래서 죽염을 만드는 사람들은
쌍골죽이 나오면 그냥 베어 버리곤 한단다.
하지만 이 녀석이라고 어디 쓸모가 전혀 없는 건 아니야.
막혀 있는 속을 파내고
몸통에 작은 구멍 몇 개를 뚫고
갈대 줄기로 떨림판을 만들어 주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대금이 된단다.
저도 대나무라 말하고 싶은 건지
그 소리는 곧고 정직하고 청명하지.

  

- 먹 -

벼루에 물을 담고 먹을 대고 문지른다.
먹과 벼루가 매끄럽게 맞물리며
투명한 물속에 검은 빛이 번진다.
동양에서는 검은 색을 물의 색이라 하는데,
퍽 어울리지 않는가.
나는 이때 나는 향을 상당히 좋아해,
먹 가는데 시간을 많이 소모 하곤 했다.
먹은 사인펜과는 달리 크로마토그래피를 실시해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순수하고 거짓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