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ude from Bach´s Cello Suite No. 1 -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에우리알레2009. 4. 20. 22:24
요요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첼로리스트
(이라고 해도 아는 사람이 몇 없지만)
요요 마(영어: Yo-yo Ma, 중국어: 馬友友, 병음: Mǎ Yǒuyǒu, 1955년 10월 7일 - )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 첼리스트이다.
요요마는 파리에서 중국인 부모 아래 태어났다. 일찍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그는 5세에 첫 공식 연주회를 가졌으며, 9세에는 뉴욕시티의 카네기홀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뉴욕시티의 줄리아드 학교에 다닐 때는 레너드 로즈와 야노슈 숄츠를 사사(師事)했으며, 그후 하버드대학교에서 인문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1991년 그의 모교는 그에게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비상한 테크닉과 풍부한 음색으로 평판이 높았던 요요마는 스탠더드 첼로 레퍼토리의 공연과 녹음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작곡가들로부터 많은 연주 의뢰를 받았다. 또한 그는 실내악의 대가로서 격식을 깨고 블루그래스 음악인들과 〈애팔래치아 왈츠 Appalachia Waltz〉를 함께 녹음하거나,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 작품 〈탱고의 영혼 Soul of the Tango〉을 녹음하기도 했다. 요요마는 세계의 주요 페스티벌에 연주자와 지도자로 여러 차례 출연했고, 그래미상도 많이 받았으며, 1978년 에이버리 피셔 상을 단독 수상하기도 했다.
고전음악의 음반들이 시장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크로스오버 음악인들이 신통치 않은 실력을 가지고도 음반 시장을 독점하던 시절에, 요요마는 고전음악의 전통과 청중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다른 분야의 음악인이나 예술가들과 서슴 없이 공동 작업을 한다거나 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그의 활동은 평론가들과 애호가들에게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98년 요요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6곡을 녹음하고 그와 관련된 영화 6편을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과 함께 찍었다. 그 프로젝트에서 요요마는 조경예술가 줄리 메세르비, 영화 감독 프랑수아 지라르, 안무가 마크 모리스, 영화 감독 애텀 에고이언, 가부키 배우 반도 다마사부로, 아이스댄서 제인 토빌과 크리스토퍼 딘 등과 함께 협동 작업을 했다. 이 영화들은 요요마와 동료 예술가들 간의 공동 작업을 다룬 다큐멘터리였으며, 바흐 음악의 재해석이었다.
요요마는 영화 〈와호장룡 臥虎藏龍〉(2000)의 음악을 연주했고, 2003년에는 라틴 아메리카 음악가들과 〈오브리가도 브라질 Obrigado Brazil〉을 협연했다. 요요마는 1998년 중국과 서양을 연결하는 고대 무역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문화적 전통을 탐험하는 예술인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그는 곧 실크로드 앙상블을 만들었고, 2002년 첫 앨범 〈실크로드 여행 Silk Road Journeys: When Strangers Meet〉을 발표했다. 그 이후 2005, 2007, 2008년에도 계속 발표되었다. 요요마는 1983년부터 2008년까지 50장 이상의 앨범을 녹음했고 이 기간동안 그래미상을 15번 받았다.
므스티슬라프 레오폴도비치 로스트로포비치
요요마의 첼로가 감정적이고 섬세하다면
이분의 연주는 좀더 다이나믹하고 힘이 넘치는 느낌이 든다.
므스티슬라프 레오폴도비치 로스트로포비치(러시아어: Мстисла́в Леопо́льдович Ростропо́вич , 1927년 3월 27일 - 2007년 4월 27일)는 소련 시절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러시아인 첼로 연주가이자 지휘자이다. 20세기에서 가장 뛰어난 첼로 연주가로 손꼽히며, “슬라바”(Slava)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러시아 첼리스트 및 지휘자. 뛰어난 기교 및 해석능력 외에도, 다양한 신규 첼로 곡들을 소화하는등,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로 꼽힘. 구 소련(현 아젤바이얀:Azerbaijan) 바쿠(Baku)시에서 태어나, 2차세계대전동안 모스크바 동쪽 10시간 거리의 오렌버그(Orenburg)로 옮겨 거주하다가 16세인 1943년 모스크바에 정착. 이후 70년대에 정치적 이유로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가 47세인 1974년 미국으로 망명, 1978년 소련 시민권을 박탈 당함. 10세때부터 유명한 첼리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연주를 배우다, 16세인 1943년, 모스크바로 옮기면서 모스크바 컨저버토리(Moscow Conservatory) 에서 공부, 29세인 1956년에 첼로 교수로 부임.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 러시아 작곡가)와 프로코피에브(Sergei Prokofiev, 1891-1953, 20세기 최고 러시아 작곡가)로부터 사사, 18세인 1945에 소련 연주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첼리스크로 인정을 받기 시작. 1942년 첫 첼로 협주를 한 이후, 수차례에 걸쳐 프라하 및 부다페스트에서 수상을 하며 23세인 1950년에는 최고의 스탈린 상(Stalin Prize)을 수상. 이후 모스크바 및 레닌그라드(Leningrad) 컨저버토리에서 강의하면서, 볼쇼이(Bolshoi) 극장소속의 소프라노 갈리나(Galina Vishnevskaya)와 결혼. 23세인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해 프로코피에브(Prokofiev)가 작곡한 첼로소나타(Cello Sonata in C, Op.119)를 초연함과 동시, 1953년 작곡가의 죽음으로 미완이 된 소나타를 카발레스키(Dimitry Kabalevsky, 1904-1987, 러시아 동요작곡가)와 함게 완성, 성공적으로 초연. 37세인 1964년, 당시 서독에서의 첫 연주를 시작으로 작곡가들로부터 많은 헌곡을 시연. 1968년, 41세때 소련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Soviet State Symphony Orchestra)와 런던(London Prom)에서 체코의 드보르작(Antonin Dvorsak) 곡으로 오케스트라 데뷰공연을 하던 중, 그날 밤인 8월 21일, 소련의 체코 침공소식에 눈물을 흘렸다 함. 구 소련의 공산주의를 반대하다 스승인 쇼스타코비치는 1948년 모스크바 및 레닌그라드 교수직을 박탈 당하며, 로스트로포비치역시 학교를 중퇴. 이후 시베리아 유배를 당함. 이후 미국 망명뒤 소련에서의 연주 금지를 당함. 1993년 러시아 헌법사건(1993 Constitutional Crisis) 시 서방세계와 같이 옐친(Boris Yeltsin) 대통령측을 옹호,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며, 차후 푸틴(Vladimir Putin)대통령과도 교류. 79세때인 2007년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램린 궁으로 초청된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장암으로 사망, 모스크바 노보데비키(Novodevichy Cemetery)에 묻힘. 수많은 곡 중에서도 특히 드보르작 및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에대한 해석이 유명.
오늘날, 바흐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사후 100년간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우연히 멘델스존이 체코슬라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있는 도서관 라데닝 문고에서
바하의 B단조 미사곡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잊혀져 있을 것이다.
그는 바하의 음악을 연구하는 회를 창립하여 조사를 시작했는데,
회에서 발견한 순서대로곡의 번호를 붙였다고 한다.
무반주 첼로모음곡 따라 붙는 번호는 BWV1009로
바하의 곡이 약 1300개 정도 되는 것으로 미루어
연구가 상당히 진행된 후에 발견 된 곡이다.
자그마치 200년 가까이 알려지지 않고있었던 것이다.
무반주 첼로모음곡이 세상에 들어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1717년말,
바흐는 바이마르를 떠나 작센 지방의 소도시 쾨텐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곳의 곳 궁정악단의 악장이 되었는데,
쾨텐의 궁정악단에는 수석(首蓆) 바이올리니스트 시피스 외에
궁정악사의 자격을 가진 첼리스트 아벨이 있었다.
바흐는 이 두 사람을 위하여 여러점의 곡을 남겼는데,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전 6곡과
[무반주 첼로조곡] 전 6곡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바흐 사후, 이곡들은 모두 사람들이 뇌리에서 잊혀져 버렸다.
그리고 200여년 후,
한 소년이 바르셀로나(마드리드라는 설도 있었다)의 고서점에서
무반주 첼로곡의 필사본 악보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곡의 아름다움에 푹빠진 소년은
누구에게도 그 곡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지나,
소년은 자신의 연주회에서 처음으로 그 곡을 선보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존재도 세상에 드러내었다.
그는 바로 파블로 카잘스, 첼로리스트에게 혼을 불어 넣은 자로 불리게될 사람이였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전설이다.
실은 파블로 카잘스는 이미 출판 되어 있던 악보를 보았고
그 곡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려 깊이 감명을 받았던 것 뿐이다.
그에 대한 본인의 언급이 있어 옮겨적어봤다.
"우리(아버지와 카잘스)는 부두 가까이에 있는 어떤 고악보 서점에 들렀습니다. 나는 악보 뭉치를 뒤져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오래돼 변색되고 구겨진 악보 다발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이었습니다. 첼로만을 위한 곡이라니! 나는 놀라서 그걸 바라보았습니다. 첼로 독주를 위한 여섯 개의 모음곡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어떤 마술과 신비가 이 언어 속에 숨겨져 있을까? 그런 모음곡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아무도, 내 선생님들조차도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곧 그 상점에 갔던 목적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오로지 그 악보 한 뭉치만을 들여다보면서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기만 할 뿐이었어요.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전혀 흐려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 악보의 표지를 보면 바다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먼지투성이의 오래된 가게로 다시 돌아가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중략) 설명할 수 없는 흥분 속에서 나는 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가장 소중한 음악이 되었어요. 그 뒤 12년 동안 나는 그 곡을 연구하고 연습했습니다. 그래요, 12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 모음곡 가운데 하나를 공개 연주회에서 연주할 만큼 용기가 생겼는데 그 때 내 나이는 이미 스물다섯 살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