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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사생문

색연필



길이는 한 뼘 정도다.

정확히는 한 뼘에서 새끼손가락 두 마디 정도 부족한 길이. 처음 이 녀석을 받아 들었을 때는 조금 더 길었지만.

매끄럽게 깎인 육각 기둥은 광택이 나는 검은 빛으로 코팅되어 있다.

연필 자루의 끝자락에서 1.6cm 정도 위로 은빛 태가 둘려 있고 첫 번째 면과 세 번째 면에는 같은 빛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다.

GERMANY SV Albrecht Dürer FABER-CASTELL
SCHWARZ, BLACK 8200-1999***
 
독일 알브레이트 듀러 파버 카스텔
검은색, 검은색

연필은 조금 울퉁불퉁 하게 깎여 있다. 연필 깎이가 없어 칼로 대충 다듬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제 멋대로인 것은 아니다. 이 색연필을 마지막으로 깎았을 때만은 적어도 연필깎이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색연필의 심은 무디어져 있다. 검은색이라기에는 약간 탁한 느낌이다. 짙은 회색이라고 부르고 싶다. 단 앞에 매우 라는 형용사가 필요할 것이다. 손가락을 문지르자 희미하게 색이 묻어난다. 서걱서걱 하는 촉감이다.

코를 가져다 대자 연필 특유의 냄새가 난다. 짙은 나무냄새다.

살짝, 혀를 가져다대자 검은색은 그대로 녹아나며 혀 위에서 미끄러진다. 쓰거나 그렇다고 단 맛도 아니다. 단지 차가운 맛이 났다. 다시 한번 색연필을 손끝에 문질러 본다. 이번엔 짙은 검은색이 그대로 배어져 나왔다. 손을 씻어야겠다.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글쟁이들의 글 이야기]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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