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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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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푸드득. 꾀꼬리는 아슬아슬한 순간 날아올라 날카로운 손아귀에서 하늘로 도망쳤다. 그러나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깃 몇 개가 뜯겨져 흩날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깊고 푸른빛 사이로 연분홍 꽃잎과 선명한 노랑 빛 깃털이 흔들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노획물 대신 허공을 휘저은 나비는 매끄럽게 몸을 비틀어 땅위로 내려섰다. 그리고 무심 한 듯, 새가 날아간 하늘은 돌아도 안보고 머리카락과 구겨진 치맛자락을 정리한다. 하지만 몸짓에 담긴 신경질 적인 기운마저 지우지는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던 운율은 무심결에 하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여전히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흰 뺨을 부드럽게 이완되어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
8 사각, 사각. 상념에 젖어있던 그는 문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시계 바늘은 제법 많이 움직여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고 미간을 문질렀다. 도수 있는 렌즈가 아니지만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투명한 렌즈 너머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어린 시절, 안경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그것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서였지만, 좀 더 자라서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안경을 쓰는 것은 볼 필요가 없는 것까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일단 시선에 들어오면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 주의를 끄는 강한 힘이 있다. 그는 성가신 일에 얽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나루가 있는 방향을 항해 시선을 보냈다. 소녀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을 ..
7 운율은 다시 교사용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빛이 나른히 하얀 도화지위로 쏟아진다. 얇은 유리창을 두드리는 바람은 아직 서늘한 감이 남아있지만, 교실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한다. 금싸라기 같은 볕만이 창가를 따스하게 데울뿐. 운율은 무의식중에 안경을 쓰다듬었다. 한기를 막아주는 창문의 모습과 그의 ‘볼 수 있는’ 눈을 봉(封)하는 안경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비슷했다. 돌이켜 보니 안경을 쓰기 시작한지 벌써 20여년이나 흘렀다. 뇌리에 다정한 한마디가 떠올랐다.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된단다.’ 그것은 오래전 세상을 뜬 조모가 그에게 해주었던 말. 어린 시절 보아서는 안 될 것이 보는 것으로 인해 고통 받던 때. 그의 부모는 이형(異形)을 보았노라는 아들의 고백을 단..
6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1학년 3반 교실. 문 안쪽에서는 소란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점심시간, 오십 여분 가량의 자유 시간 동안 흐트러진 아이들에게 조용히 자습을 하면서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중 하나. 단 5분이라도 더 많이 까불고 떠들고 싶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역시 수업도 중요하다. 운율은 예고 없이 교실의 문을 열었다. 아직 중학생 티를 벗지 못해 자그마한 소년소녀들이 화들짝 놀라서는 재빨리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책상에서 자세를 바로하면서도 아이들은 국어 시간인데 최명학이 아닌 운율이 들어오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운율은 아이 들을 둘러보며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
5 상념에 젖어있는 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던 소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얀 꽃잎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깊은 호수를 닮은 촉촉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녀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아니, 사실 그렇게 느린 속도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 그 모습에서는 일종의 엄숙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삼켜졌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운율은 어떠한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암(暗). 그순간 만물은 색을 덧칠해 진 듯, 짙고, 선명하고, 그러면서도 어두운 빛으로 감싸였다. 조금 전까지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맑은 빛이었던 풍경들은, 그 순간만큼은 유화의 그것처럼 무겁고 강한 질감을 띠고 있었다. 세상이 넓고 거대한 검은 천에 뒤덮인 것 같았다. 그리고, 모..
4 그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네 살. “엄마, 저기 이상한 아저씨가 있어.” 뜰에서 놀다 평소처럼 가벼운 기분으로 조잘거린 한마디에 엄마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그래? 엄마 눈에는 안 보이는데?” 가볍고 무게 없는 대답은 그가 기대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몇 번인가 어머니에게 ‘그것’에 대하여 말한 적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흘려들을 뿐, 결코 분명히 대답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단 한번도. 가끔 그들과 시선이 마주칠 때가 있다. 물론, 그것들 모두에게 ‘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숨을 죽이고 조용히 주시하는 기척이 전해져 온다. 검고 서늘한 의식은 언제나 서서히 다가와 주위를 맴돈다. 그리고 끈..
3 그는 셔츠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어 입에 물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멀어져 가자 여인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아름다운 녹색의 눈동자 속에 자리한 동공은 세로로 길다. 여인은 잠시 동안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훔쳐보며 코를 킁킁 거리다 독한 담배 냄새가 흘러들자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어버린다. 약간 거친 입술 사이로 가느다랗게 담배 연기가 흘러나와 바람결에 흩어졌다. “귀찮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소녀, 김나루는 아직도 건물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엇을 보는 것일까. 시선은 학교 어딘가로 뻗어 있었다. 다시 강한 바람이 불었다. 남색 체크무늬 치맛자락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바람결에 춤추는 벚꽃 잎 사이로 사라질 ..
2 ‘이번에 전학생이 올 예정이다.’ 며칠 전, 갑작스레 수업중인 운율은 불러낸 이사장이 던진 첫 마디이다. 그렇게 말하며 책상 위로 내밀어진 것은 전학생의 대한 신상명세가 적혀있는 파일.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내용을 대충 훑어보던 그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 : 김나루 성별 : 여 나이 : 만 16세. 신장 : 158cm 성적 : 양호 ‘생후 1개월 안쪽에 서울 강남의 어느 골목에 유기됨. 그 후 근처에 거주 중인 한 부부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며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둘째로 입적됨. 차츰 성장하며 주위에서 상식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괴현상이 출몰. 처음에는 부부 역시 아이를 감싸고 이해하려 했으나 차츰 그 정도가 더해감에 따라 기피하기 시작.’ 그 뒤로는 괴현상과 관련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