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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蝕:ecli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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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고 청명한 바람이 불어온다. 짙은 고동색 나뭇가지가 바람을 따라 흔들리며 꽃잎을 흩뿌렸다. 하양, 연분홍빛 꽃잎들 사이로 벌들이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웅거리며 떨리는 수천의 날갯짓은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취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소리에는 어딘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힘이 어려 있다.

  그는 언제나처럼 2층 미술실의 창가에 나른히 앉아 교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식물을 좋아하는 이사장의 취향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교정은 여러 종의 나무와 화초들이 정성껏 가꾸어져 있었다. 벚꽃만이 아니다. 복숭아꽃과 살구꽃, 이화, 매화…. 대부분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라는 것이 이사장답다면 이사장답다랄까.

  운치를 즐길 줄 아는 학생들이 그 아래 앉아 도시락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몇몇은 이를 배경으로 장난스러운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가롭고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는 남자의 앞머리 위로도 따스한 햇볕이 내리쬔다. 검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에서 빛이 반짝이며 흩어지는 모습이 덧없으면서도 따스해 보였다.

  그러나 그 아래 자리한 눈은 베일 듯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다. 만약, 그 앞의 펼쳐진 광경이 고요히 쌓여 있는 눈의 들판이었다면 조금쯤 괴리감이 줄어들었을까.

  그의 무릎에는 한 여인이 머리를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광경이었다. 이제 신학기가 시작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교의 교실에서 마치 밀회라도 즐기는 듯, 여인은 달콤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의 옆에 앉아 가만히 부드러운 갈색의 머리카락을 부벼대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곱슬거리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눈에서는 정념이라든가 욕망 따위의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천천히 습관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부드럽게, 계속해서.

  기분이 좋은 듯 여인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 무릎에 더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왔다.

  멀리서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린다. 아직 교정에 남아 꽃을 즐기던 몇몇 학생들이 서둘러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듯 그렇게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순간, 바람이 거칠게 불더니 한 무더기의 꽃잎들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그는 무의식중에 시선으로 그 나비처럼 흔들리는 작고 하얀 조각들을 쫓았다. 연약한 꽃잎은 그저 바람이 이끄는 대로 날갯짓 하다 이윽고 학교의 정문 앞에서 흩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어깨 조금 위에서 잘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지고 있었다. 교복은 단정했고, 손에는 고동색의 조금 낡아 보이는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다. 유달리 피부가 희어 보이는 것은 벚꽃 사이로 스며드는 하얀 빛 무리 때문일까.

  등교 시간이라기엔 지나치게 늦었으나 소녀에게서는 지각생 특유의 초조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단지, 마치 그러기 위해 서있는 것처럼 하얗게 물든 교정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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