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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蝕:ecli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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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념에 젖어있는 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던 소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얀 꽃잎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깊은 호수를 닮은 촉촉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녀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아니, 사실 그렇게 느린 속도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 그 모습에서는 일종의 엄숙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삼켜졌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운율은 어떠한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암(暗). 그순간 만물은 색을 덧칠해 진 듯, 짙고, 선명하고, 그러면서도 어두운 빛으로 감싸였다. 조금 전까지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맑은 빛이었던 풍경들은, 그 순간만큼은 유화의 그것처럼 무겁고 강한 질감을 띠고 있었다. 세상이 넓고 거대한 검은 천에 뒤덮인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단 한번 눈을 깜빡이 사이,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온화한 빛이며 가벼운 봄의 기운이 다시 교정에 맴돌았다.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는 운율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가볍고 아름답고 덧없는 하얀 꽃잎들이 그 뒤를 따라 교실 안으로 흩뿌려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교사로 향하고 있었다. 그 발치에는 이미 검은 민달팽이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운율은 조금 전 자신이 목격한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허나 그림자들이 갑자기 정화 되었다는 것 이외엔 무엇 하나 알아낼 수 없었다. 갑자기 들이키는 담배 연기가 지독하게 쓰게 느껴졌다.

  그때,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운 선생님, 운 선생님!”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제법 다급한 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운율은 손을 뻗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안경을 집어 썼다. 투명한 유리알이 눈동자를 덮자 그때까지 풍기던 서늘한 기운이 서서히 지워졌다. 대신 흐릿하고 평범한 존재감이 그 자리를 메웠다.

  창틀에 서 있던 여인의 모습 역시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커다란 녹색 눈을 가진 길고 아름다운 갈색 털의 노르웨이숲 고양이 한마리가 남아 있을 뿐. 고양이는 그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며 따스한 볕을 만끽하고 있었다.

  “운 선생님, 운율 선생님! 안에 없어요?!”

  문을 두드리는 이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운율은 부드럽게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최명학 선생님.”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섰다. 대답이 늦은 것에 조금 불쾌한 감이 있었으나,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 때문에 최명학은 금세 그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실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전학생 때문에 서류작업할 일이 좀 생겨서 그러는데 미술 수업과 시간을 바꾸었으면 합니다만….”

  김나루는 아마 최명학의 교실에 배정된 모양이다. 전학생이 오면 이것저것 설명을 하고 서류를 정리하는 작업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 그래서 그는 담당인 국어 수업을 진행하기 어려워져 운율은 찾아온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 내려가 보지요.”

  승낙의 말에 최명학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그것도 급하게 전학생이 와버려서…. 응? 운 선생님. 저기 저 고양이는 뭡니까?”

  마음의 여유를 찾은 최명학의 눈에 뒹굴 거리는 커다란 고양이가 들어온 모양이다.

  운율은 소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이 근처에 돌아다니는 녀석인데, 창가에 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와서는 내려가지 못하고 있더군요. 하하.”
  “호오, 그렇군요. 저, 그럼 수업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바빠서 이만.”

  최명학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 거의 뛰다시피 문을 나섰고, 운율은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늘어져 있는 책상 위에서 몇 가지 물건을 챙겨들고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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