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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蝕:ecli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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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1학년 3반 교실. 문 안쪽에서는 소란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점심시간, 오십 여분 가량의 자유 시간 동안 흐트러진 아이들에게 조용히 자습을 하면서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중 하나. 단 5분이라도 더 많이 까불고 떠들고 싶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역시 수업도 중요하다.

  운율은 예고 없이 교실의 문을 열었다. 아직 중학생 티를 벗지 못해 자그마한 소년소녀들이 화들짝 놀라서는 재빨리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책상에서 자세를 바로하면서도 아이들은 국어 시간인데 최명학이 아닌 운율이 들어오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운율은 아이 들을 둘러보며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국어 시간은 미술과 바꾸기로 했다. 최명학 선생님은 조금 바쁘셔서….”

  그의 설명이 이어지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최명학이 진행하는 국어수업은 조금의 쉴 틈도 없이 펜을 놀려야 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제법 버거워했다. 몇몇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는데, 손재주가 별로 없어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녀석들이었다.

  “자, 자 조용.”

  그다지 커다랗거나 무서운 목소리도 아니건만, 아이들은 얌전히 입을 다문다. 그의 목소리는 무개감 있고 침착해 듣는 이로 하여금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운율은 가져온 도화지 꺼내어 천천히 느긋한 동작으로 나누어 주며 설명했다.

  “갑작스럽게 수업이 바뀐 관계로 오늘은 연필, 또는 펜을 이용한 자유화를 하기로 했다. 주제는 봄. 연상되는 것을 그리면 되는데, 생각나는 게 없으면 정원의 꽃이라도 그리고.”

  꽃이라도 그리라는 말에 몇몇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커다란 꽃 하나만 대충 그리고 남는 시간동안은 수다라도 떨려는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들려온 말이 실망을 금치 못했다.

  “단, 정성을 들여 그리는 것 잊지 말도록. 내신에 방영할거니까.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도 좋다.”   

  종이가 빠짐 없이 아이들 손으로 넘어가자  교실은 곧 사각거리는 소리와 나지막이 소곤거리는 소리로만 가득해졌다. 운율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교사용 책상에 앉아 천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몇몇 여학생들이 그 모습을 훔쳐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을 그릴 때 그는 평소 학생들이 알고 있던 얼굴과도, 안경을 벗고 있을 때와도 다른 느낌이다. 잔뜩 몰입해 있는 그 얼굴은 함부로 말을 걸기 힘든 일면이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는 가운데, 교실 문이 예고 없이 열렸다. 운율은 고개를 들어 방문자를 확인했다. 최명학과 함께 소녀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운율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이들은 낯선 여학생이 들어서는 것을 보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최명학은 운율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들을 향하여 설명했다.

  “자, 조금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전학생이다. 앞으로 같은 반에서 생활할 것이니 사이좋게 지내도록.”

  그리고 여학생을 향하여 소개를 하라는 듯 손짓했다.

  “안녕하세요.”

  주눅 들거나 까부는 말투가 아닌 단정하고 투명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몇몇 남학생들은 ‘오오’ 하는 소리를 내며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소녀는 말을 이었다.

  “김나루 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듯한 자세가 마음에 든 듯 최명학은 나루를 향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말했다.

  “자, 그럼 일단 소개는 이쯤해서 끝내고, 나루는 저기 제일 뒤쪽 창가에 자리가 있으니 거기 앉으면 되겠구나. 혹시 시력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지?”

  “네. 오히려 좋은 편이예요.”

  “그래, 그럼 나는 이만 나가보마. 운선생님 그럼 실례 했습니다.”

  최명학이 운율의 이름을 부르자 나루가 살짝 그를 돌아보았다. 운율은 그녀을 흘깃 바라보고는 최명학을 배웅했다. 그리고 도화지 한 장을 꺼내어 나루에게 건네었다. 

 “자, 여기 받아가라.” 

 나루는 두 손으로 종이를 받아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술을 담당하고 있는 운율이라고 한단다. 지금은 미술수업 중이고. 봄을 주제로 자유화를 그리고 있으니까, 연필이나 볼펜으로 그리고 싶은걸 그리거라.”

  “네.”

  도화지와 운율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나루는 얌전히 대답하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나루를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던 남자아이들 중 하나가 이이를 제기했다.

  “선생님! 너무해요, 전학생이 왔는데 그냥 계속 수업하시기예요?”

  “그런 것은 담임인 최명학 선생님 시간에 건의하도록.”

  단칼에 자르는 말에 말을 꺼낸 남자아이는 울상을 지었고, 아이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소란도 잠시, 다시 교실은 정적과 사각거리는 소리만으로 가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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