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작가는 엘리너 퍼어전이다.
동화 라고 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이야기는 대부분
왕자와 공주가 나와 결혼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하는 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재봉사라든가 혹은 글자 조차 읽지 못하는 소녀일 때도 있고
왕관이나 왕자는 나몰라라하는 공주님이 나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살고 있으니까요."
여섯 명의 공주가, 한결같이 자기 머리털만을 위하여 살아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아득한 옛날, 한 임금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임금님은 결혼할 때가 되자, 아름다운 집시 여자를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왕비를 어떻게나 사랑했던지,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임금님은 왕비를 위하여 정원 한가운데에 훌륭한 궁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왕비가 달아나기라도 할까 봐 조바심이 난 나머지, 왕비의 나들이를 금지시켰습니다. 임금님은 그래도 마음이 안 놓였던지, 마침내 궁전 주위에 튼튼한 울타리를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궁전 안에 갇혀만 지내는 왕비는 울타리 너머의 세상이 몹시 그리웠습니다. 그러나, 왕비도 임금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임금님의 뜻에 따르고 있었습니다.
왕비는 바깥 세상이 그리울 때면 가끔 궁전 옥상에 올라서서,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바깥 세상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 왕비는 꽃같이 아름다운 쌍둥이 공주를 낳았습니다. 임금님은 아주 기뻐하며,
"사랑하는 왕비여, 나를 이렇게 기쁘게 해 준 보답으로 당신에게 선물을 하고 싶소. 어떤 선물을 원하는지 말해 보구료."
하고 말했습니다. 왕비는 임금님과 함께 궁전의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동쪽 울타리 저편에 보이는 목장을 바라보며,
"목장에 5월이 왔군요. 임금님, 저에게 봄을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임금은 왕비의 요구를 쾌히 승낙하고, 5만 명의 정원사를 불러들였습니다.
"너희들은 제각기 봄에 피는 꽃나무를 한 그루씩 구해 와서, 궁전의 정원에 심도록 하라."
정원사들은 임금님의 분부대로 했습니다. 이윽고, 궁전의 정원에는 가지각색의 꽃들로 가득 찼습니다. 임금님은 왕비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와서, 울긋불긋 피어 있는 꽃들을 가리키며,
"사랑하는 왕비여! 이 봄은 죄다 당신의 것이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왕비는 꽃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숨만 지었습니다.
그 이듬해, 왕비는 또 쌍둥이 공주를 낳았습니다.
임금님은 이번에도 왕비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왕비는 임금님과 함께 궁전의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남쪽 저 멀리 바라보이는 골짜기를 가리키며,
"골짜기 사이로 강물이 흐르고 있군요. 강을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임금님은 이번에도 왕비의 요구를 승낙하고, 5만 명의 일군을 불러들였습니다.
"궁전의 정원에 강줄기를 끌어들여서, 왕비의 산책길에 아름다운 분수가 솟아오르게 하라."
임금님의 분부를 받은 일군들을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공사가 끝나자, 임금님은 분수가 치솟고 있는 정원으로 왕비를 데리고 갔습니다.
"사랑하는 왕비여, 시원스럽게 솟아오르는 분수를 보시오."
그러나, 욍비는 한동안 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없이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또 한 해가 지났습니다. 왕비는 이번에도 쌍둥이 공주를 낳았습니다. 임금님은 왕비와 함께 궁전 옥상으로 올라가서, 이번에는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왕비는 북쪽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을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임금님은 5만 명의 나팔수들을 그 거리로 내보냈습니다. 얼마 뒤, 나팔수들은 여섯 명의 진실한 여자를 데려왔습니다. 임금님이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왕비여, 당신의 소원대로 여기 사람들이 왔소."
왕비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여자들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남몰래 눈물을 훔친 후, 여섯 명의 여자에게 각각 공주의 유모가 되게 했습니다.
어느덧, 왕비가 임금님에게 시집온 지도 4년이 되었습니다. 왕비는 일곱 번째 공주를 낳았습니다. 임금님은 몸집이 크고 금발이었는데, 일곱째 공주는 왕비를 닮아 작고 머리털은 진한 갈색이었습니다. 임금님은 이번에도 왕비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고, 왕비는 서쪽 하늘에 날고 있는 새를 보며,
"아! 새를 주십시오!"
라고 외쳤습니다. 임금님은 곧 5만 명의 사냥군을 불러 새를 잡아 오게 했습니다. 사냥군들이 산으로 떠나자, 왕비가 임금님에게 말했습니다.
"임금님, 지금은 공주들이 조그만 침대에서 지내고, 저는 옥좌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조그만 침대는 비게 될 것이고, 저 또한 옥좌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공주들 가운데 누군가가 저를 대신해서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겠지요. 어느 공주를 이 자리에 앉히시렵니까?"
임금님이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데, 사냥군들이 돌아왔습니다. 임금님은 작은 머리를 가슴털 속에 파묻고 있는 비둘기를 바라보다가, 하얀 몸에 긴 목을 뽐내는 백조에게로 눈을 돌리더니 말했습니다.
"머리칼이 가장 긴 공주를 그 자리에 앉히겠소. 그리고, 나의 뒤를 이을 여왕으로 삼겠소."
왕비는 6명의 유모에게 임금님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각기 맡은 공주의 머리 가꾸기에 온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너희들의 솜씨에 따라 공주들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걸 명심해라."
그러자, 한 유모가 물었습니다.
"막내 공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맡겠다."
왕비는 이렇게 말하고, 유모들을 돌려 보냈습니다.
그 날부터, 유모들은 자기가 맡은 공주의 머리털 가꾸기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유모들의 정성어린 시중으로 6명의 공주들의 머리털은 모두 명주실처럼 고와졌습니다. 공주들은 한결같이 두 갈래로 땋은 머리에 예쁜 리본을 달고, 그 위에 꽃을 꽂았습니다. 마침내, 6명의 공주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긴 머리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공주가 있는 곳에는 6마리의 백조가 늘 함께 있었습니다.
한편, 막내공주에게는 비둘기가 꼭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늘 붉은 수건으로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막내공주의 머리털이 어떤지는 왕비와 공주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막내공주는 분수에 머리를 감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가끔 왕비가 막내공주를 옥상으로 데리고 가서, 남몰래 머리를 빗겨 주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왕비는 자기의 목숨이 끝날 날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비는 딸들인 일곱 공주를 모두 불러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임금님에게 옥상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옥상에 올라온 왕비는 임금님의 품에 안긴 채,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이는 목장이며, 강, 시장, 언덕 들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랑하던 왕비가 죽자, 임금님은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성문을 지키는 파수병의 나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한 병사가 달려 들어와서, '세계의 왕자'가 찾아왔다고 전한 것입니다. 임금님의 허락을 받은 파수병이 성문을 열자, 세계의 왕자가 하인 하나와 함께 궁전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왕자는 온몸을 황금빛 망토로 감싸고 있었는데, 그 망토의 길이가 아주 길었습니다. 그래서, 왕자가 임금님 앞에 섰을 때에는, 망토 자락이 방 안 가득히 퍼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자에 달린 깃도 무척 길어서 천장에 닿을 정도였습니다.
"반갑소! 세계의 왕자님."
임금님이 반기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왕자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잠자코 서 있기만 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왕자의 하인이 임금님 앞으로 성큼 나서더니,
"임금님, 반가이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 임금님의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임금님은 의아해하면서 왕자의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왕자님은 벙어리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만, 아뭏든 지금까지 왕자님이 얘기하시는 걸 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도 임금님이 미심쩍어하자, 그 하인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 세상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쟎습니까? 말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 부자와 가난뱅이, 생각하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 위를 보는 사람과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
하인은 말을 하다 말고 임금님과 왕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주인님은 저를 직접 하인으로 택하셨습니다. 주인님과 저는 각기 세계의 양쪽에 살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주인님과 저 사이에 온 세계가 끼어 있는 셈이지요. 저의 주인님이 세계의 왕자인 까닭도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왕자님은 부자이고 저는 가난뱅이입니다. 왕자님은 생각하고 저는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죠. 뿐만 아니라, 왕자님은 저를 내려다보고 저는 왕자님을 올려다보고, 왕자님은 말씀을 안 하시고, 저는 이야기하고......"
"왕자님은 무슨 일로 오셨소?"
그대로 두었다가는 하인의 이야기가 끝이 없을 것 것 같아, 임금님이 말을 가로챘습니다. 그러자, 하인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 나라 공주님과 결혼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왜냐 하면,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므로,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하고, 왕자님에게는 공주님이......"
"과연 그럴 듯한 말이오."
임금님이 다시 하인의 말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나에게는 공주가 일곱 명이나 있다오. 그런데, 왕자님은 하나이니 일곱 공주 모두와 결혼할 수는 없지 않겠소?"
"염려 마십시오. 왕자님은 이 나라 여왕이 되실 공주님과 결혼하기를 원하시니까요."
"그렇다면 잘 되었소."
임금님은 곁에 있는 신하에게,
"드디어 공주들의 머리털을 잴 때가 되었다. 공주들을 모두 불러 오너라."
하고 분부했습니다.
이윽고, 공주들이 임금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6명의 공주들은 저마다 유모와 함께 왔습니다. 그러나, 막내공주는 혼자였습니다. 왕자의 하인은 공주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왕자는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잠자코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왕실의 재봉사에게 자를 가져오라고 일렀습니다. 재봉사가 자를 가져오자, 6명의 공주들은 제각기 머리를 풀어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방바닥에 닿았습니다. 재봉사는 공주들의 머리털의 길이를 차례차례 재었습니다. 유모들은 이 광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서로 자기가 맡은 공주의 머리털이 가장 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일이 난처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유모들이 모두 너무나 정성을 들여 머리칼을 손질해 왔기 때문에. 6명의 공주의 머리털 길이가 모두 똑같았던 것입니다.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술렁거렸습니다. 유모들은 안타까와 양손을 마구 비볐고, 임금님은 혀를 차면서 왕관만 만지작거렸습니다.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막내공주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만일, 막내 공주의 머리털 길이마저 다른 공주와 똑같다면 어떻게 하지?"
임금님이 이렇게 걱정하자, 막내공주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님, 전 똑같지 않아요."
막내공주는 머리에 감고 있는 붉은 수건에 손을 가져갔습니다. 유모들과 다른 공주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막내 공주를 지켜 보았습니다.
이윽고, 막내공주가 머리에 두른 수건을 풀었습니다. 과연 막내공주의 머리털은 다른 공주와 달랐습니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마치 사내아이처럼 짧은 머리였습니다.
"누가 네 머리털을 그렇게 잘랐느냐?"
임금님이 놀라며 물었습니다.
"어머님입니다."
막내공주가 대답했습니다.
"저 옥상에 올라가 산비둘기와 놀고 있을 때, 어머님께서 항상 가위로 잘라 주셨습니다."
"그래? 누가 내 뒤를 이어 여왕이 될 지 모르지만, 아뭏든 너는 안 되겠구나."
임금은 실망한 듯이 말했습니다.
이것이, 오직 자기 머리칼만을 위하여 살아간 6명의 공주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뒤에도, 6명의 공주들은 유모들의 시중을 받으며 머리털을 가꾸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결국 공주들의 머리털은 그들을 따르던 6마리의 백조처럼 하얗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왕자는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 공주들 중에서 누군가의 머리가 가장 길어져, 자기의 아내가 되어줄까 하고 그 날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아직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의 왕자는 어쩌면 지금까지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편, 막내공주는 머리털 따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껏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머리에 붉은 수건을 쓴 채 궁전 밖으로 나와, 들이며 언덕, 강, 목장, 시장 같은 곳을 두루 돌아다닌 거지요. 막내공주 곁에는 늘 비둘기가 따라다녔고, 나중에는 세계의 왕자의 하인도 따라왔습니다. 전처럼 남루한 옷을 걸치고 말입니다.
한 번은 막내공주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왕자님 곁에 당신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그러자, 그 하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런 대로 잘 해 나가실 겁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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