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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해구아래/사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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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핀 이 머리핀은 내가 가진 핀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나는 병원에 입원해 있기 때문에 이 것을 실제로 보고 관찰해서 쓸 수가 없다. 단지 내 기억에 의존해서 글을 적을 뿐이다. 이 것은 핸드메이드 제품인데, 대학교 1학년 무렵에 아는 동생과 아이 쇼핑을 하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지름신’을 강림 시켜버린 물건이다. 길이는 6cm정도. 5mm 쯤 되는 폭의 클립에는 광택 도는 아마빛 띠로 밴딩 되어있어 수수하면서 우아한 느낌을 풍긴다. 클립의 끝에 지름 1.3cm, 높이 4mm의 수정이 달려있다. 이 수정은 각진 원뿔 모양으로 커팅되어 있다. 마치 우산을 위에서 바라본 것과 유사한 모양이다. 수정은 금속 밭침에 박혀있고, 이 밭침은 낚시 줄로 클립에 강하게 고정되어 있다. 밭침 ..
알약 얼핏 보면 마치 아몬드 초콜릿처럼 생겼다. 하다못해 색깔마저도 초콜릿 같은 진한 고동색이다. 폭 1cm, 길이 2cm의 럭비공 모양의 이 알약은 젤라틴 같은 거죽으로 감싸여 있다. 이 거죽이 포장재에 달라붙어버리는 바람에 캡슐을 꺼낼 때 상당히 고생을 했었다. 찰싹, 아주 살갑게 달라붙어버리는 바람에 긁고 누르고 찌부러트려도 모양만 변하지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결국 손톱 끝으로 잡고 끄집어내기는 했지만, 이렇게 성가셔서 어디 사먹겠냐고. 그렇게 긁고 누르고 찌부러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꼬집힘까지 당했지만 거죽이 튼튼한지 다시 원래의 럭비공 모양으로 돌아간 알약을 들고 천천히 살펴봤다. 옆면에 가는 실선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같은 재질의 판을 두 장 겹쳐서 만든 캡슐인 듯. 코끝으로 ..
우유와 요구르트 우유는 매일 ESL 우유, 요구르트는 롯데 엑셀런트 비피더스로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냉장고 안에 있는 게 그 것 뿐이라서! 먼저 우유와 요구르트의 색을 비교해봤다. 우유는 약간 푸른빛이 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하얀색이다. 하지만 요구르트 쪽은 희미한 붉은 빛이 돈다. 발효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사과과즙 포함 제품이기 때문이다. 잔을 살짝 기울이자 우유의 표면이 살랑 거리며 물결친다. 하지만 요구르트 쪽은 마치 물풀처럼 한 박자 느리게 표면이 기운다. 기울인 잔에 코끝을 가져다 대고 향을 맡는다. 우유는 포근한 향이 난다. 약간 달콤함이 섞인 고소함이 느껴진다. 요구르트는 강한 단 향과 상큼함이 풍긴다. 식욕이 도는 산기다. 우유를 마셨다. 매끄럽게 입술로 흘러든 하얀 액체는 우유 특유의 풋풋함을 ..
요플레, 마늘빵 요플레 개인적으로 슈크림 빵을 즐기지 않는지라 요플레로 대체했다.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들어있는 이 녀석의 이름은 바이오거트. 빨간 딸기와 하얀 딸기꽃 그림 아래에 파란 색으로 선명하게 적혀있다. 조심스럽게 힘의 조절을 잘해서 바이오거트를 따보자 퐁하는 듣기 좋은 소리가 난다. 뚜껑에는 언제나 그렇듯 내용물보다 좀더 단단한 질감의 요구르트가 붙어있다. 부드러운 요구르트의 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단 냄새와 딸기향이 선명하다. 살짝 기울여보자 요구르트가 매끄럽게 흐른다. 찰랑거리는 물과는 달리 묵직하고 점도 있는 흐름이다. 준비해뒀던 숟가락으로 바이오거트를 휘저어 보았다. 점점이 딸기 씨와 분홍빛 딸기 과육이 연분홍 요구르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자 요구르트 특유의 산미와 부드러..
베개 난 베개를 매우 가리는 편이다. 평소 사용하던 베게가 아니면 깊이 잠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적당한 높이에 푹신푹신해서 머리에 베면 푹 꺼지는 그 느낌을 좋아하고, 이 베개 역시 마찬가지이다. 크기는 가로로 세 뼘 반, 세로로는 두 뼘 하고 손가락 하나정도. 커버는 헐거운 느낌의 섬유로 짜여 있는데 베이지색과 하얀색이 단조로운 줄무늬를 그리고 있다. 선의 폭은 손가락 한마디정도. 그 위에 간간히 내 머리카락이 붙어 있다. 어느 것은 굵고 어느 것은 얇다. 또 어느 것은 짧고 어느 것은 길다. 같은 머리에서 나온 머리카락인데도 다른 것이 재미있다. 커버에 있는 지퍼를 열고 베갯속을 꺼낸다. 한쪽 구석에는 텝이 붙어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오늘 이 베개가 ‘녹차경주베개’라는 품명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가방 나에게는 몇 개의 가방이 있다. 가방에 대해서 글을 쓰라는 문장을 본 순간, 이 가방이 떠오른 것은 아마 내가 최근에 가장 자주 들고 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 녀석은 풀색으로 체크무늬가 염색된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다. 손으로 쓸어보자 오돌토돌한 요절이 걸린다. 크기는 제법 커서 서류 파일도 쉽사리 들어간다. 어깨끈과 가방의 안쪽은 연한 연둣빛이 도는 겨자색이다. 어깨끈은 몸통과 마찬가지로 가죽이지만, 우둘투둘하지는 않다. 가방의 안쪽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천으로 덧대어져 있다. 주머니가 양쪽 벽에 하나씩 있어 자잘한 물건을 넣기 편하다. 그리고 얄따란 지갑이 하나 안에 딸려 있는데, 난 여기다가 생리대를 넣어 다닌다. 양쪽의 주머니는 자주 열었다 닫았다 하기 때문이다. 다시 밖을 살펴보자. 이번엔 아..
선풍기 사생문을 쓰기 위해 선풍기를 찾았다. 장식장 옆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녀석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밝은 군청색. 군데군데 하얗거나 검은 긁힌 자국이 보인다. 게다가 먼지도 제법 많이 뒤집어쓰고 있어서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녀석의 목은 마치 교수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댕강 부러져서 힘없이 떨어져 있다. 부러진 틈바구니로 전선이 보인다. 빨강, 노랑, 하양. 간신히 그 전선들에 매달려 선풍기의 둥글고 무거운 머리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은 면한 상태다. 선풍기가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까닭은, 지난가을 판이 녀석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겁을 상실한 그야말로 개냥스러운 고양이는 선풍기를 캣타워로 착각이라도 한 것인지 그 육중한 몸으로 가녀린 산풍기의 머리..
리모컨 사생문을 위하여 일주일에 한두 번 만질까 말까한 리모컨을 찾았다. TV옆, 쇼파 위, 쇼파 위의 방석 밑…. 여기저기 뒤척거리다가 쇼파 앞 탁자 위에서 발견했다. 어수선하게 늘어놔져 있던 책과 신문지 덕분에 눈에 짤 띄지 않고 숨어있었던 것이다. 길이 한 뼘 정도 되는 이 리모컨이 길어 보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폭이 좀 좁은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손가락 두 마디 반 정도이다. 덕분에 그립감은 상당히 좋아 손에 꼭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네 개의 손가락으로 밑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는 자세가 잡힌 다랄까. 리모컨에는 여러 가지 버튼이 있는데, 이는 크게 세 부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위쪽에 있는 동그랗고 작은 버튼들. 각각, 전원, TV/외부입력, 숫자, 취침예약, 소리 줄임 버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