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깊은해구아래/사생문

(25)
커튼 흐릿한 날이지만 그래도 창문으론 빛이 스며든다. 빛은 커튼을 반쯤 통과하여 그 앞에 놓인 노란색 프래지아 화분을 화사하게 비춘다. 커튼은 상당히 얇고 부드러워 봄의 따스한 날씨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커튼이 겨울 동안에도 내도록 걸려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봄에 어울리는 것에 감탄을 하기 보다는 에너지 절약에 대한 집 주인의 무심함에 탄식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연한 상아색의 천. 그 위에 아주 흐릿한 연두색이 섞인 회색으로 무늬가 그려져 있다. 그 색상을 컴퓨터 그래픽 색상 번호로 표현 하자면 B1CF9A라고 적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렇게 표현하면 색을 정확히 지정 할수는 있으나 그다지 운치는 없을 것이다. 커튼 위에는 가로세로 14cm정도의 네모들이 교대로 그려져 있는 것을 눈치 채는 것..
라면 - 삼양사의 대관령 김치라면 삼양사의 대관령 김치라면이 본 사생문의 주인공이올시다. 사실, 오늘 라면을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어머님께서 라면 먹자고 유혹하는 것도 뿌리쳤건만) 보아하니 사생문 과제로 라면 올라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저는 어쩔 수 없이 라면을 끓여 보겠습니다. 먼저, VONO 스프컵으로 세잔의 물을 냄비에 넣습니다. 그리고 분말스프와 건더기 스프가 혼현일체인 라면 스프를 투입, 끓인 뒤 두 동강 낸 면을 넣어 다시 꼬들꼬들하게 끓입니다. 자 완성! 그럼 관찰 돌입입니다. 먼저 냄새. 일명 라면 냄새가 납니다. 짭쪼름 하면서도 어딘지 후추를 떠올리게 만드는 매콤함. 음, 이름은 김치면인데 김치 냄새는 별로 안 납니다. 다음은 면! 잘 익어 젓가락으로 휘어 감어 들어 올리자 탄력 있게 튕겨져 오르는 꼬불꼬불..
CD-RW CD의 일종으로, 일반 공CD가 한번 기록을 한 뒤 재사용이 불가능 한 것과는 달리, 다시 사용이 가능한 물건이다. 즉, 그 안에 담김 내용을 지우고 자유롭게 다시 쓰기가 가능한 물건이란 말씀. 갑자기 ぼくらの의 오프닝 Uninstall이 생각 난다. 물론 생긴 모양은 일반 CD와 같다. 원판 모양에, 두께는 1.5mm정도. 지름은 자가 없어서 측정 불가. 원판의 한쪽 면은 은색 필름이 붙어 있다. 정보를 기억하고 출력 하는 것은 이 필름 부분으로, 손상이 가지 않게 플라스틱판으로 보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CD-RW는 별로 사용을 많이 하지 않아서 필름이 보이는 쪽에 긁힌 자국이 거의 없다. 뒤집어서 뒷면에 인쇄된 모양을 살피면 용량이 700mb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향을 맡으면 희미하게 비닐을 ..
거울 거울하면 일단 떠오르는 것은 차가운 감촉이다. 유리로 만들어진 이 물건은 반질반질 매끄러운 감촉과 단단하며 서늘한 느낌이 공존한다. 거울에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면, 그것은 언제나 대칭으로 움직일 것이다. 결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간격과 속도로. 사실, 거울이 오늘날과 같이 유리로 만들어 진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다. 그것은 유리를 만드는 기술 자체가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것이 더뎠기 때문이고(유리 제조기법은 일급비밀이라 해도 좋았다), 그 뒤에 금속을 씌워 거울을 만든다는 발상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는 반질반질하게 잘 닦은 철판에 얼굴을 비춰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는 것은 파문이 이는 호수에 얼굴을 비춰보느니만 못했을 것이다. 시각..
커피 - 맥스웰 하우스 오리지널 맥스웰 하우스 오리지널. 갈색의 금속 병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 캔을 따자 픽 하는 공기가 흘러드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속 안을 들여다보지만 캔이 속이니 만큼 빛이 들어가지 않아 단지 검게 보일뿐. 캔을 기울여 입구 쪽으로 내용물이 약간 흘러나오게 한다. 마치 한약처럼 탁한 갈색의 액체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향은 한약과는 달리 약간 달달하면서도 씁쓸하다. 캔을 입가로 가져가 한 모금 머금는다. 커피향. 그리고 어딘지 달고나를 떠올리게 만드는 맛이 나는데, 탄산수소 나트룸 때문에 그런 맛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해본다. 목이 말라서 벌컥벌컥 다섯 모금 만에 다 마셔 버렸다. 하지만 상당히 달달한 편이기 때문에 갈증은 해결 되지 않을 것이다. 물 떠와야지.
화장품 - 달리 심므 어떤 화장품을 선택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화장품 가게에서 향수도 판다는 것에 착안, 제멋대로 향수로 결정지었다. 서랍을 뒤적거리다 상당히 오래된 향수 하나를 선택 했다. 나의 첫 향수. 그 녀 이름은 달리 심므. 살리바르도 달리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이 향수는 기묘한 병에 담겨있다. 코와 입술 모양의 이 병은 묘한 느낌을 풍긴다. 피부를 연상시키는 살몬 핑크빛의 액체가 아랫입술 끝자락에서 찰랑거린다. 연분홍빛 뚜껑을 살짝 열자 달짝지근한 향이 난다. 지나치게 달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농도가 짙은 복숭아며 백합의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우아한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 향수를 보면 언제나 떠오르는 씁쓸한 기억이 한 가지 있다. 조금 우아하지만 새침하고 허언을 잘하는 여자아이. 마치 큰 비밀이라도 말하듯 가..
작약 그것은 옅은 연분홍색의 꽃이었다. 섬세한 잎맥을 따라 우아한 빛깔이 번지듯 물들어 있다. 잎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빛은 흐려지며 점차 흰 색에 가까워진다. 꽃잎은 총 열장. 조금 큰 다섯 개의 꽃잎과 교차하여 다시 다섯 개의 작은 꽃잎이 올라앉아 있다. 그 중심에서 샛노란 황금빛 수술들이 제 모습을 뽐낸다. 연녹색 암술은 그 가운데서 살그머니 웅크리고 있다. 물결치듯 자유롭게 끝이 갈라진 꽃잎은 여린 깃털처럼 가벼워 보인다. 손끝으로 쓸어보자 약간 서늘하면서 매끄러운 촉감이 전해져온다. 작약을 닮은 미인이란 분명 이처럼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이를 말하는 것일게다. 달콤하고 짙으며 깊이 있는 향이 피어오른다. 우아하고 고혹적이다. 마치 와인처럼 어딘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향기다. 기분이 들뜬다. 꽃이란 이..
어쩌다보니, 유러피언프리코치즈버거 사실, 새우버거를 먹을 것이라고 예고를 하기는 했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손에 들어온 것이 이름도 요란 뻑저지근한 유러피언프리코치즈버거. 자그마치 11글자나 된다. 사운드 호라이즌의 11문자의 전언도 아니고!! 어제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를 예상 못하고 이불을 얇은 것 하나만 덥고 잤더니 도로 감기에 걸려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해더니, 생전 먹어볼 생각도 안했던 이 비싸신 햄버거를 가져 오셨다. 여튼, 받은 것이니 감사히 먹겠습니다! 포장지는 럭셔리한 광택이 도는 치즈 빛. 주황색과 노란색으로 치즈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영어와 한글로 유러피언프리코치즈버거라고 쓰여있다.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한줄이 더 적혀 있다. [화재발생 위험이 있으니 전자렌지에는 절대 넣지 마십시오] …역시, 은박인건가! ..